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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휠로그 Nov 04. 2022

골목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간

한순간에 지옥이 된 낭만의 공간 '골목'에 대해

저는 이태원에 일 이외의 목적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클라이언트가 그곳의 맛집을 강하게 원하는 경우 혹은 주요 브랜드들이 클럽에서 진행하는 행사를 촬영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태원은 자동차 중심으로 생활하는 이들에게 친화적이지 않습니다. 주행도 주차도 어렵습니다. 

2022년 10월의 마지막 주말, 이태원에서 말하기도 두려운 사고가 났습니다. 저는 한 블록 근처에 있었는데 사고 난 줄을 몰랐다가 나중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뉴스로 그 참상을 들었습니다. 30일 새벽 1시 정도였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30명이 심정지 정도라고 했는데, 물론 그 수치만으로도 놀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사망자 수를 보고, 그게 시설 붕괴도 아니라 압사라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떠오르는 게 딱 그 골목 공간의 구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좁은 내리막 골목, 거기였습니다. 놀고자 거길 찾은 것뿐인데, 참변을 당하신 많은 분들의 명복을 빌며, 최근 매체들과 글쟁이들이 그렇게 예찬했던 '골목'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자동차에게 편한 공간은 

사람에게 불친절하다고?


현대 건축의 개념을 정립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sier, 1887. 10. 6~1965. 8. 27)는 마천루가 있는 현대적 도시 공간의 창안자이기도 합니다. 높은 건물을 지어 기업 시설을 몰아넣고, 그 사이의 대로는 차들이 자유롭게 달릴 수 있게 만든 그의 스케치는 프랑스의 라데팡스나 한국의 삼성동 등을 방불케 해 건축에 입문하는 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sier, 1887. 10. 6~1965. 8. 27)

르 코르뷔지에가 이러한 도시 개념을 갖게 된 데는 몇 가지, 그에게는 위협적이었을 사건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상하수도 시설입니다. 사실 유럽에 콜레가 창궐한 시기는 코르뷔지에가 태어나기 50년 전의 일이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본격적으로 건축 일을 하기 위해 파리를 찾았던 1900년대 초반만 해도, 파리의 위생 상태는 콜레라 창궐 시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나고 자란 스위스의 라쇼드퐁 지역은 자연과 가까운 중산층 도시라, 똥물에 똥을 더하고 그 물을 길어 다시 씻는 수준이었던 파리에 적응하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파리를 완전히 재탄생시키려면 전쟁을 통한 파괴라도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가졌던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죠. 물론 그 일은 현실로 일어났습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

또 한 가지 위협적인 경험은 자동차 사고 직전의 경험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자동차를 산업의 개념으로 끌어들인 선진국이었습니다. 현재도 유럽 자동차 시장에서 존재감이 강한 최고(最古)의 자동차 기업 푸조, 시트로엥이 프랑스 차이니까요. 그런데 프랑스의 길은 자동차와 사람이 안전하게 다닐 곳은 못 됐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증기기관 자동차를 처음 발명한 프랑스의 퀴뇨조차 자신의 발명품에 치어 죽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을 자동차 중심의 도시 공간 계획이며 인간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는데, 사실 그의 계획은 차와 사람이 각자 자유롭기를 바란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북촌 한옥마을, 연희동?

이태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은 서울 시내에 더 있습니다. 북촌 한옥마을 일대, 연희동에서 연남동으로 이어지는 구가옥 개조 카페거리. 모두 작정하고 붐비면 답이 없는 곳입니다. 군중 밀도를 제어할 수 없는 곳이죠. 특히 북촌 한옥마을이나 서촌 같은 경우, 그 인근에서 테마 축제라도 열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아찔합니다. 그나마 이태원은 바로 대로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있는데도 그 정도였는데 골목과 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북촌이나 서촌이라면 족히 수백 명의 압사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도로들은 '걷기 좋은 거리'로 포장되어 미디어에 유통됐습니다. 좁고 반듯하지 않은 길의 불편이 낭만으로 포장된 것입니다. 이태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N리 단길' 유행의 원조인 경리단길도 인근에 있죠. 좁은 골목에 자리한 식당과 앤틱 물품 가게는 반듯반듯한 신도시의 삭막함에 대항하는 서울의 영혼쯤으로 묘사됐습니다. 이런 논의는 특히 대형 프랜차이즈 식음료 체인 중심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거부감과 시너지를 이뤘습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그 지역 마을에 살았던 선대 거주자들의 이용 통로를 최대한 살리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주변 공간과 어떻게 조화시키고 안전을 도모할 것이냐는 고려는 빠져 있었습니다. 


물론 북촌이나 서촌은 일대 자체가 워낙 넓다 보니 이태의 그 좁은 공간과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습니다. 하지만 그 사고의 가능성이 낮을수록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을 때의 피해는 반비례해 커질 수 있습니다. 도박의 배당과 비슷한 것이죠. 


연남동에서 연희동 쪽으로 확장된 아름다운 카페 및 식당 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사는 심하지 않지만 인파가 밀집된다면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곳이죠. 실제 연희동 방향으로는 차로가 좁은 이태원과도 비슷한 구조입니다. 그나마 홍대입구 전철역과 약간 거리가 있어, 이태원처럼 전철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이 밀려드는 상황이 벌어질 위험이 조금 적긴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 곳이죠. 



차에게 친절하지 않은 길

사람에게도 위협적이다


자동차와 사람의 크기 차이는 엄청난 것 같지만 사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74cm이고, 중형차의 전폭이 대략 185~190cm 정도임을 감안하면 사람 서넛이 차지하는 공간과 차 한 대가 차지하는 공간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차가 지나가기에 좁은 정도의 공간이라면 사람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차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결국 물리적인 공간의 부족으로 생길 수 있는 사고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는 말입니다. 



물론 해밀튼 호텔과 이태원 상권 골목을 8차선 도로로 만들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형과 지반 특성 무엇보다 비싼 지가 때문에 그런 개발도 쉽지 않습니다. 다만 차량이 운신하기 어려운 도로의 '정비'는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는 것을 이태원 사고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태원뿐만 아니라 차량 통행이 많은 곳이라면 지나치게 협소하게 구성된 도로들은 분명히 정비 필요성에 대해서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도 제시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교통사고가 날 뻔한 위험에서 살아남아 위대한 건축가가 됐습니다. 이태원 사고에서 목숨을 잃은 꽃다운 이들의 가능성이 과연 120년 전 청년 르 코르뷔지에보다 못했을까요? 개발과 토건이라는 이슈만 나오면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가짜 인문주의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좁은 골목엔 결코 낭만이라는 천사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서늘한 죽음의 유령도 함께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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