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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휠로그 Jan 08. 2023

정려원? 한 물 가지 않았나?라고 생각했는데...

3주 만에 120만 뷰, 캐딜락 XT4 광고 영상

정려원? 한 물 가지 않았나? 


지난해 12월 12일, 캐딜락이 콤팩트 럭셔리 SUV인 XT4의 TV 광고 뮤즈로 정려원을 선택했다고 했을 때 든 생각이었습니다. 속으로나마 그렇게 생각한 것, 정려원 씨와 캐딜락 모두에게 미안합니다.



15초로 축약된 버전만으로도, XT4의 이번 광고는 압도적입니다. 3주 만에 12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조금 이른 시점에 광고를 시작한 그랜저가 370만 정도입니다. 국내에서 캐딜락이 캠페인에 쓸 수 있는 비용은 현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지요. 그걸 가지고 이 에이전시는 돈 주고 사 들어도 아깝지 않을 음악과 반복 재생하고 싶은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2023년의 형용사패뷸러스(fabulous)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형용사 중 하나가 패뷸러스(fabulous)가 아닐까 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패뷸러스(The Fabulous)>도 있고요. SNS 상에서는 패뷸러스라는 키워드가 여러 가지 동영상과 결합해 밈(meme)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기막히게 멋진’이라는 패뷸러스는 원래 ‘공상적인, 우화적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라이프스타일 쪽으로 가져온다는 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관심받는 삶에 대한 욕망을 담은 표현입니다. 단순히 멋지다는 말을 넘어, 현실감을 잊게 만든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패뷸러스는 2022년 말에 등장한 단어지만, 이형용사는 2023년 주요 바이럴 마케팅에서 상당히 유효할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적인 OTT 드라마들은 시간이 지나도 상당한 버즈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45초가 아깝지 않은 풀버전


이 광고의 풀버전은 45초입니다. 요즘 콘텐츠 수요자들에겐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상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45초를 기꺼이 할애한 이들의 반응입니다. 15초의 압축본도 잘 만들었지만 원본은 그 사이 숨은 장면들이 더 좋은 반응을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크게 스튜디오에서 정려원의 이미지와 차량의 이미지를 각각 보여주는 부분, 차량 주행 장면(교량, 버스 정류장), 터널 씬, 스튜디오, 야외에서 정차 후 차에서 내리는 씬으로 구성돼 있죠. 



스튜디오 내 원형으로 늘어선 막대 조명 사이에서 실루엣만으로 등장하는 정려원의 모습과, 제한적 조명 속에서 차량의 각 부분을 확대하고 디테일의 질감을 보여 주는 장면, 그리고 정려원이 차를 쓰다듬다가 차량에 탑승하는 장면까지가 한 흐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주행 씬은 조금 더 세부적으로 나뉩니다. 비스듬하게 촬영된 교량 구간에서의 측면 주행씬,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 씬, 중앙 구조물을 배경으로 한 터널 주행 씬, 드론 씬 등입니다. 그리고 주행 장면에서 보이는 배경의 조형 요소들은 중간에 삽입되는 정려원의 스튜디오 씬 배경의 조형 요소들을 통해 비유적으로 배치됩니다. 예컨대 터널을 지나는 장면에서는 정려원의 주변의 막대조명이 순차적으로 점등됩니다. 버스 정류장 전광판이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은 스튜디오에 늘어선 미러 씬으로 나타났습니다. 조형적으로는 이를 반향(reverb)의 개념으로 보는데, 극적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기법입니다. 과하면 지루해지지만 짧게 교차하면 순식간에 보는 사람의 정서를 강하게 자극합니다. 



전체적으로 특별한 창의력이 적용된 영상이라기보다, 자동차를 촬영하는 스튜디오라면 누구나 제안할 법한 영상입니다. 물론 같은 수많은 중국 음식점들이 거의 비슷한 메뉴를 제공하지만 그 사이에도 맛의 완성도는 다르듯, XT4의 영상 흐름은 끌릴 만한 완성도를 발휘합니다. 


해상도는 4K로 적용됐는데 인물과 옷, 자동차의 표면 질감 표현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에 처음 들어온 ‘라떼 메탈릭’ 컬러의 차종의 표면, 캐딜락 엠블럼과 고광택 블랙 라디에이터 그릴, 정려원의 피부, 액세서리, 반짝이 의상 등의 질감이 모두 손 끝에 닿을 듯합니다. 


여기에 음악이 광고를 살렸습니다. 스피디하고 심플한 2박의 하우스/테크노 타입 사운드는 잘게 쪼개지는 장면에 리듬감을 부여했습니다. 동시에 36초 정도부터 나오는 신서사이저 코드 톤은 불필요한 멜로디 없이도 밀도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이렇게 짧은 시간은 음악가에겐 제약입니다. 특히 마무리가 쥐약이죠.. 하지만 ‘Don’t Be Mondy Be Friday Night, Be Fabulous’라는 정려원 특유의 허스키한 영어 보이스를 통해 임팩트 있게 마무리됐습니다. 



섹시한 40대 여성한국의 미를 대표하다


저는 1999년에 대학에 입학한 99학번입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5인방과 같은 40대 초반이죠. 정려원이 속해 있었던 샤크라는 99, 00학번이 대학 1, 2학년일 때 주요 대학 축제 단골손님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게 20년도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려원의 현재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습니다. 매스미디어의 전성기부터 싸이월드를 거쳐 모바일, 가상공간 네이티브의 시대까지를 그냥 한순간에 관통한 듯한 외모입니다. 물론 완전히 20대 같다는 건 아니지만 어딜 봐도 중년 여성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특히 28분대, 고스(goth) 분위기를 살린 메이크업, 앞머리 있는 웨이브를 한 모습은 30대 초반의 부잣집 막내딸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XT4의 포지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로 정려원의 이전 자동차 광고는 무려 17년 전인 2005년 쌍용 액티언이었습니다. XT4 광고에서의 정려원은 그때와 비교해봐도 큰 변화가 없습니다. 



이번 XT4 광고 영상을 보면서, 이전부터 생각해오던 게 조금 확실해졌습니다. 현재, 한국의 뷰티 트렌드를 이끄는 연령대는 10~30대가 아닌 40대라는 사실입니다.


XT4 광고 영상에서 정려원의 모습은 현재 가장 성공한 40대 여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낭창낭창한 간 생머리가 어울리며, 어느 클럽에서든 환대받을 듯한 몸매와 패션을 자랑합니다. 시간과 비용이 충분하다면 피부도 20대 후반 못지않게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20대에는 가질 수 없었던 내면의 깊이가 있죠.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는 조금 늦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 데 에너지를 쏟느니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면 되니까요. 이런 말들을 종합하면 간단합니다. 지금의 한국의 40대 여성들이야말로 섹시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매력적인 중년 여성이라는 ‘장르’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끈적한 농담이나 위험한 유혹의 주체로 포지셔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정려원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섹시한 40대 미인은 다릅니다. 20대, 30대 여성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신선함과 건강미가 공존합니다. 애써 누군가를 유혹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중력을 발휘하는 그런 매력적인 존재인 것이죠. 


캐딜락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최근 수년간 브랜딩의 가치를 소홀히 하는 마당에 차량별로 어떤 존재감과 아우라를 만들고 그걸 어떤 이들에게 들이밀지를 정하는 것은 무리였을 겁니다. 딜러의 살 깎기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고 기대되는 절대 판매량이 많지도 않은데 할인으로만 승부하려 했던 과오가 있었습니다.



XT4 역시 포지션이 애매했습니다. 럭셔리 콤팩트 SUV라는 측면에서 메르세데스 벤츠의 GLA나 아우디 Q3 등이 경쟁 대상이지만 캐릭터가 명확하지는 않았죠. 그러나 적어도 그 포지셔닝의 애매함은 이번 광고를 통해 어느 정도 완화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광고에 관련된 반응들이 하나같이 긍정적입니다. 이 급의 차종들은 이성보다 감성 소구가 필수적입니다. 제한된 예산으로 수입차를 산다는 것 자체가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니까요. 그런 점에서 감히 이 광고는 올해의 자동차 광고상이 있다면 최종후보에 올라 마땅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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