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즈음부터 세돌 반 첫째 햇님이가 한글책을 유치원에 가져가겠다고 난리였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바다 건너 온 책인데다가 전집 구성물인지라, 가져갔다가 망가뜨리거나 하면 나중에 한권만 따로 구하기도 어려우니 유치원에 가져가지 말라고 했었다. 영어 그림책을 들고가서 찢어지거나 가위로 난도질 당하거나 물에 젖어 돌아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왠만해서는 말 잘 듣는 첫째가 그러나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어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허락해주곤 했다. 다행히(?) 구겨져 온적은 있지만 찢긴 적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왜 그렇게 한글책을 가져가고 싶어하는지 알게 되었다. 저번 유치원에서의 일인데 아이들이 꿀벌에 대해 배우던 때에 남편이 아침에 유치원에 같이 가서 교원 자연이 소곤소곤 시리즈의 꿀벌 책을 영어로 번역해 읽어주고 설명해 주었다. 책의 내용과 사진의 섬세함에 아이들도 좋아했지만 그보다도 선생님들이 더더욱 열광했다. 한국에는 이런 책도 있냐며 정말 좋은 것 같다고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이 그리 좋아해 주니 햇님이도 그게 내심 좋아서 책을 계속 들고가려 했던 것이다.
올해부터는 자연관찰 책에 이어 그레이트북스 내친구 과학공룡 시리즈도 주구장창 들고간다. 처음에는 정말 안들고갔으면 했다. 위의 꿀벌 책은 비록 중고였지만 새책같은 상태였는데 전쟁통같은 유치원에 몇번 다녀오고 나서는 명예로운 상처를 잔뜩 얻어왔다. 간지테이핑을 덕지덕지 두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책은 간만에 새로 산, 게다가 외관도 정말 예쁜 사랑스러운 책들이라 혹시 상하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보낼 때마다 신신당부를 한다. 책을 안볼 때에는 사물함에 꼭 넣어라, 안찢어지고 젖지 않게 조심해라, 친구들과 같이 잘 보더라도 아예 친구 손에 주고 잊어버리지는 말아라, 상하면 새로 못산다, 상하면 끝이다! 이제는 본인도 자기 책 소중한지 알 나이라 그런지 다행히 아직 상한 책은 없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햇님이가 유치원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있으면 그것과 관계된 책을 꼭 들고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셨다. 아이가 알아서 수업 보충 및 확장 자료를 들고오니 정말 대견하고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이다. 또한 이렇게 배운 것을 연계해서 책을 가져오는 아이는 햇님이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자연관찰 책이나 과학 책 전집은 그냥 지식들을 재밌게 받아들였으면 해서 들인 거였는데 이렇게 유치원의 배움 활동과 연계해서 도움이 되니 괜히 뿌듯하긴 했다.
한번은 초원 동물들에 대해 배울때 자연이 소곤소곤의 기린 책을 들고갔다. 오후에 데리러 갔더니 선생님께서 맨 뒷장에 독후활동으로 있는 '재활용품으로 기린 만들기 페이지'를 복사한 걸 보여주더니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같이 만들어 보겠다며 신이 나서 말씀하셨다. '한국어로 적혀있어서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대충 따라하면 되지?'라며 말이다. 사실 휴지심 수집이 안되서 결국 만들기는 못한 거 같지만 아무튼 우리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가 주시니 기분이 좋았다.
최근에는 내친구 과학공룡의 '지구를 지켜 줘!' 책을 들고가곤 했는데 오늘 아이의 사물함에서 이 종이를 발견했다. 선생님께 여쭤보니 환경 오염에 대해 배울 때 책을 다같이 본 후 이 책의 표지를 복사해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색칠하는 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햇님이의 책 덕에 아이들의 사물함에는 한국어가 적힌 종이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햇님이 반 스무명 남짓의 아이들 중에 부모 중 하나가 한국인인 친구가 두어명 있지만 모두 다 한국어를 사용하진 않는다. 그러니까 한국어를 하는 아이는 햇님이 한명 뿐인 셈인데, 당당하게 한글 책들을 가져가며 나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자기가 책 내용을 이야기해 주고 한국어도 종종 가르쳐 준다니 너무 대견하고 기특했다.
요새 한국어 읽기를 다시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글을 가르치려 해도, 심지어 한글학교를 보내도 너무너무 읽기에 관심이 없어했었다. 몇달 전에는 '엄마가 읽어주면 되니까 나는 읽기를 몰라도 되지.'라고 말하는데, 속이 터져서 그만 '책 안읽어줘 버린다?!'하고 소리칠 뻔 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나름 관심을 보여 해보고는 있지만 그닥 성과가 큰 편은 아니다. 햇님이는 책을 보면 그림에 심하게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한번 스윽 지나가며 본 그림을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그게 왜 그런지, 그림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지까지 꼬치꼬치 따져 묻는 스타일이라 글자라는 시시한 검정색 뼈다귀들에는 통 관심이 안 가는 것 같았다. 그러려니 하곤 있지만 그래도 내심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최근들어 많이 마음을 내려놓고 있긴했는데,오늘 이 종이와 선생님의 말씀 덕에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졌다. 한국어 그거 좀 빨리 읽지 못하면 어때, 한글 책을 사랑하고 한글을 이렇게 세계로 전파(?)하고 있는데. 나중에 아예 못 읽을 것도 아닐 텐데 계속 한글 책에 대한 흥미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데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잃지 않게 하는 데에만 더 집중하고, 조급해하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둘째 때문에 책을 읽어줄 시간이 너무 없는데 읽어주기에는 다시 분발해야겠다. 요새는 부쩍 내용의 진위 여부를 따지며 '진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싶어.'라고 노래를 부르길래, 어제 위인전 전집을 들여왔다. 그런데 맘에 안드는 부분이 있어서 오늘 다른 출판사 걸로 교환을 하러 갔더니, 주문하면 한달 후에나 온다고 해서 아예 다른 책 세트를 사버렸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보여주고 싶었던 프뢰벨 테마동화 시리즈 신판을 중고로 득템! 유치원에서 영어로 읽어본 책들도 꽤 있어서 그런지 햇님이가 엄청 좋아했다. 글밥이 적은 것부터 엄청 많은 것까지 수준이 다양한데, 글밥이 적은 것은 혼자 읽어보기를 해봐야지 싶다.
아, 얼른 좀 알아서 혼자 읽었으면 좋겠다. 나의 읽기 실력은 그만 늘려도 되는데 말이다. 결론은, 그래도 제발 빨리 배워 줘 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