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말해준다는데.
나를 살찌운 다섯 가지 집밥
1. 시래기 된장찌지개
외할머니가 끓인 된장찌개는 어쩐지 ‘된장찌지개’라는 울진 사투리로 불러야 더 맛이 난다. 애호박을 톡톡 썰어 넣은 것도 좋지만 무시래기를 넣고 자작하게 졸인 게 최고다. 그 찐한 된장 국물에 밥을 비벼다가 짭조름하게 간이 밴 시래기랑 같이 한 숟갈 크게 푹 떠 넣으면, 캬아…! 세상 밥상을 다 정복한 기분이다.
천하제일 요리라고 호들갑을 떨어대니, 내가 놀러 간다고 하면 외할머니는 당장 시래기 된장찌지개부터 끓인다. 더 고소한 맛이 나도록 일부러 시래기에 콩가루를 묻혀 끓이는 정성도 쏟는다.
한 그릇 뚝딱 비우고 한 그릇 더 뜬다. 사실 난 콩가루 안 묻힌 시래기 된장찌지개를 훨씬 더 좋아하지만 외할머니에겐 비밀이다. 하나라도 더 맛난 음식 해주려는 그 마음 앞에서 어찌 감히 좋고 싫음을 논할까. 콩가루 묻힌 시래기 된장찌지개도 참 맛있다.
2. 오징엇국
어머니는 밥상에 당신의 고향 음식을 즐겨 올렸고, 덕분에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나를 살찌운 건 팔 할이 울진 바닷가 음식이다. 내가 ‘엄마 음식’ 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음식들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징엇국이 대표적이다.
멸치 다신 물에 오징어와 무, 양파, 고추를 썰어 넣고 간장으로 맑게 간 해 끓인다. 바다 향 그윽한 국물을 음미하며 쫄깃쫄깃 오징어 살을 씹는다. 대구 토박이 친구들에게 오징엇국 이야기를 꺼내면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고들 말한다. 해물탕에나 넣어 먹을까 말까 한 오징어를 국 재료로 쓴다니 낯설 법도 하지.
쇠고기 대신 조개나 생선 들어간 미역국, 혹은 그냥 미역만 넣은 미역국이 좋다. 칼국수 사 먹으러 갔는데 해물칼국수는 없고 닭칼국수만 있으면 실망한다. 고기 안 굽고는 살아도 회 안 먹고는 못 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내륙에서 나고 자랐으나 입맛만큼은 바다 아이들 못지않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말해준다는데, 어쩌면 나는 대구 출신의 울진 바닷가 사람인 걸까.
3. 찐 생선
외할머니는 매일 냉동실에서 고기를 낚는다. 얼려놓은 생선들이 외할머니 손에 낚여 하루 한 번씩은 꼭 밥상 위로 오른다. 고등어, 가자미, 임연수어, 명태, 대구, 열기… 주로 구이나 국이 되고 간간이 조림이 되는데 명절 전후로는 찜이 대세다. 양념 끼얹은 찜 요리가 아니라 바닷바람에 반쯤 말린 생선을 그대로 찜통에 쪄낸 것이다. 건조할 때 이미 바닷물이나 소금을 뿌리기 때문에 따로 간을 할 필요도 없다.
우리 어머니 설명인즉슨 원래 울진에서는 생선을 반건조시켜 쪄 먹는 일이 많은데 외갓집에서는 매번 구워 먹었단다. 하지만 손님을 여럿 치러야 하는 명절에는 한 마리씩 구워내기가 힘드니 찜통에 여러 마리 넣고 쪘고, 그 시절의 전통이 지금껏 남아서 명절 무렵엔 외가에서 찐 생선을 볼 수 있는 거란다.
동향 출신인 아버지도 찐 생선을 참 좋아한다. 생선 좀 쪄먹자고 아버지가 조르면 어머니는 못 이긴 척 대구에서는 흔치 않은 ‘꾸덕꾸덕하게 말린 생선’을 찾아 이 시장 저 시장을 돌아다닌다. 구운 생선과 달리 비늘 모양이 적나라하게 살아 있는 게 징그럽다며 어릴 적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찐 생선인데 나도 언젠가부터 문득문득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구이보다 훨씬 담백하고 부드러운 그 맛, 그 질감. 어디서 돈 주고 사 먹기도 힘든 집 반찬이라 그리움만 커진다. 조만간 나도 어머니에게 찐 생선을 조르게 되려나.
4. 식혜(식해)
쌀로 빚은 달콤한 전통 음료를 ‘식혜’라 부른다는 사실을 테레비 광고를 보고서 처음 알았다. 우리 집에서 쌀로 빚은 전통음료는 ‘감주’라고 부르고, ‘식혜’*란 밥반찬을 말한다. 채 썬 무와 잘게 토막 낸 생선, 밥알을 섞어 김치처럼 양념한 후 삭힌 반찬.
예전에 학교 친구들이 내 도시락을 보며 “그거는 뭔데?” 하고 물었던 반찬 중 하나가 식혜였던 기억도 난다. 바닷가가 한참 먼 대구 사람들로서는 날생선과 무와 밥알과 고춧가루라는 괴이한 조합을 볼 일이 전혀 없을 테니. 어린 마음에 그 남다른 도시락 구성에 괜히 주눅이 들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얼마나 맛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사전을 찾아보니 내가 줄곧 ‘식혜’라 알고 불러왔던 반찬의 표준어 표기는 ‘식해’였다. ‘식해’는 남해안이나 서해안에는 없는, 동해안만의 식문화라고 한다.
5. 생미역
둘째 언니네 부부가 대구 부모님 집으로 놀러 오던 날, 어머니는 ‘우리 사위’ 밥상을 잘 차려주겠답시고 엄청나게 큰 그릇에 생미역을 산처럼 쌓아 식탁 한가운데 올렸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다가 나중에 언니와 대화를 하면서 문득 그 상차림이 서울 출신 형부에게는 몹시 낯설었겠구나(!) 깨달았다. 가뜩이나 밥상에 항상 고기반찬이 올라오는 집에서 컸다는데, 갈비찜이나 쇠고기구이가 오를 법한 자리를 웬 해초 한 다발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내심 얼마나 당황했을까.
어머니에게 싱싱한 갈색 생미역 한 대접이 그만큼, 갈비찜이나 쇠고기구이 한 대접 버금갈 만큼 귀하고 맛난 음식이라는 뜻일 테다. 당장 “울진 가면 뭐 먹고 싶어요?”라고 물어보면 “생미역…!”이라 답하시는 분이니. 어머니가 평소 생미역, 생미역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란 걸 잘 아는 외할머니는 제철이 되면 으레 장에 가서 미역 큰 묶음을 사다 놓고 전화를 건다. “니 미역 사놨으니 갖고 가라.”
모전여전인지 나도 생미역이 좋다. 뻣뻣한 줄기를 오독오독 씹으면 쌉쌀하고 짭짤한 바다 맛과 향기가 입안에 확 퍼지는 게 좋다. 깔깔하니 떫은 뒷맛마저 좋다. 외가에 놀러 가 밥상에 생미역이 올라와 있으면 당장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생색을 내며 놀린다. “엄마! 나 지금 뭐 먹게요?” 놀리면서 생각한다. 아, 우리 어머니도 같이 와서 생미역 한 사발 실컷 먹고 가면 정말 좋을 텐데.
* 우리가 흔히 밥상에서 보는 녹색 미역은 익힌 미역이다. 건미역도 미역을 한번 데쳐서 말린 거라, 갈색 생미역(물미역)처럼 물씬 풍기는 바다 내음은 기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