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의 필요성> 넬(Nell)
"똑똑똑."
노크 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떠보니 가느다란 햇살 한 줄기가 내 오른쪽 발가락을 강하게 찌르고 있었다. 방문 손잡이에 닿을 듯 말 듯 한 발가락으로 손잡이를 잡으려다가 이내 내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술냄새에 온몸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이윽고 3등분으로 얼기설기 접힌 종이 하나가 방바닥에 널브러진 원고들을 밀어내며 좁다란 고시원 방 안으로 들어왔다. 3일까지 고시원비 내라는 거겠지.
다시 발가락을 움직여 불을 켜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햇빛 들어오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다. 천장에 닿을 것 같은 높이에 달린 손바닥만 한 창문을 옆방과 나눠 쓰는 이 방에서 흔치 않게 햇볕이 잘 들어오는 시간이다. 옆 방보다는 싸다는 이유로 창문의 1/4 밖에 나눠 쓰지 못하지만 아침저녁을 구분하는 것 정도는 됐다. 햇빛이 발가락으로 왔으니 열한 시쯤 됐으려나. 조금 넓은 관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니 책상 위에 구겨지다 못해 공이 되어 버린 신문지가 눈에 밟혔다. 아, 내가 아직 안 버렸네.
어제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한 달을 기다린 소설 공모전 결과 발표에서 나는 입상 바로 직전에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작가가 심사하는 데다가 공모전 주제가 '해체된 관계 속 사랑과 연민'이었으니 나만큼 잘 쓸 사람도 없겠다 싶었다. 공대 들어가라는 아버지 말 안 듣고 몰래 문예창작과에 원서 넣었다가 헛똑똑이라는 소리와 함께 집에 못 들어간 게 10년이다. 그 10년 세월 동안 몰래 내 뒷주머니를 채워주던 어머니. 그리고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시인이 내 뒷바라지를 하겠다며 시를 포기하고 카피라이터가 됐으니, 나만큼 관계 해체와 사랑과 연민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혜원이는 문예창작과 1년 선배였다. 학교 수업에서 시 전공, 소설 전공 학생끼리 짝을 지어 서로의 글을 보고 각자의 시각으로 첨삭해 주는 수업이 있었는데, 그때 혜원이를 처음 만났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을 쓸 줄 알던 사람이 내가 술김에 쓴 단편을 보더니 나한테 반했다고 졸졸 쫓아오기 시작한 거다. 선배라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내가 아르바이트비가 떨어지고 어머니가 몰래 넘겨주는 용돈도 못 받을 때면 어떻게 알고 밥을 사주는지 당할 제간이 없었다. 그저 내 글이 좋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 글을 쓰는 나를 사랑해 줬다. 나는 분명 좋은 소설가가 될 거라면서 졸업 후에도 나를 지원해 주기 시작하더니, 내가 졸업할 때쯤엔 내 고시원비라도 내주겠다며 시를 포기했다. 어차피 카피라이팅도 짧고 간결하게 쓰니 시와 다를 것 없다며 별안간 취직을 해버린 거다.
나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나의 첨삭 선생님이기도 했던 혜원은 내가 공모전에 제출하기 전에 문장을 봐주곤 했다. 관짝 같은 침대에 내가 쪼그려 앉아 있으면 혜원은 초등학교 때 만났던 구몬 선생님처럼 책상 앞에 앉아 미간에 잔뜩 주름을 만들면서도 항상 가볍게 보는 거라며 운을 띄었다. 가볍게라는 말처럼 혜원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이 부분은 고치면 좋겠다면서 파란색 펜으로 자기 의견을 적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꼭 파란색으로 고치냐 물어보면 빨간색은 틀린 것처럼 느껴진다면서. 그런데 이번 공모전 응모작은 혜원이도 파란색 펜을 몇 번 딸깍 거리기만 했을 뿐 고칠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솔직하고 나답게 잘 썼다면서. 혜원이가 내 글에 작은 의견 하나 달지 않았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글이 왜 입상을 못 했을까.
책상 위 꼬깃해진 신문지를 억지로 펼치자, 존경하는 작가님이 내 글을 읽고서 한 말이 떠올랐다.
'관계 속 사랑과 연민은 잘 느껴지지만 해체라는 것은 그저 사랑과 연민을 강조하고자 하는 도구로 느껴진다. 해체라는 것은 유기적인 관계임에도 지속하기를 포기한 상태임을 잊은 듯했다.'
사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올해가 마지막 지원이라고 하는 어머니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아버지 몰래 챙겨놓은 비상금이 올해로 똑 떨어졌단다. 고시원에 처박혀 글이나 쓰고 있냐는 아버지의 등살에 어머니도 나가떨어진 거지. 이번만큼은 금의환향해서 아버지가 못 이기는 척 마을 앞에 걸어 놓은 플래카드를 보는 걸 상상했는데 그것도 끝났다.
신문에서 나의 낙선을 확인한 혜원은 팀장에게 아프다고 거짓말하며 반차를 쓰고 나를 만나러 왔다. 혜원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쌈밥을 먹자며 식당으로 데려갔다. 한 상 차려진 쌈밥을 한 두 입 먹고 있자니 혜원이는 평소처럼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잘조잘 대면서 내 밥 위에 커다란 고기를 계속 올려주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거구나. 나에게 혜원이가 넘쳤구나.
소화나 시키자며 들어간 공원은 기상이변으로 날씨가 이상해져서인지 단풍나무며 공원 바닥까지 붉은 초록으로 얼룩덜룩했다. 아무 말 없이 사각거리는 낙엽을 밟다가 혜원에게 말했다. 이젠 그만하자고. 한참을 가만있던 혜원이는 차가운 듯 따뜻한 가을날 같은 얼굴로 가방에서 만년필 하나를 꺼냈다.
"이걸 가져올까 말까 고민 많이 했었는데. 다행이다. 마지막 선물이야. 이걸로 포기하지 말고 꼭 글 써. 난 네 글이 제일 좋아. 이번 달 고시원비는 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생각보다 담백하고 깔끔했던 혜원이와의 이별을 뒤로하고 고시원 앞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을 사서 들어갔다. 이미 다섯 시가 지났는지 고시원 방은 이미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소주병 부딪히는 소리만 가득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나에게 없는 결핍을 만든다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글 그거 하나 쓰겠다고 내가 지금 혜원이랑 헤어진 거야? 그런데 나도 참 답도 없는 글쟁이라, 나의 결핍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 순간에 이걸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혜원이도 글 쓰라고 했으니까. 나는 잔인하게도 나의 추잡한 욕망을 쏟아내려고 혜원이의 이별 선물을 쓰려했다. 그 만년필이 원고지를 마주하며 빨간 잉크를 토해내기 전 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