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 이적
밤 8시 30분. 동네 골목길 수선집과 분식집 사이에 홀로 불을 켜놓은 카페에서 지수가 온갖 증기를 맞으며 비질땀을 흘리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 기념 아프리카 여행에서 나이지리아 원주민들이 커피콩 볶는 모습에 반해 그 길로 원주민들에게 커피 볶는 법을 배운다며 몇 년을 투자하고는 한국에 돌아와서 카페를 차렸다. 한적한 골목이라 권리금도 거의 없는 가게지만 아이들 등하교시켜주는 엄마들의 아지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테이블 두어 개 겨우 둘 정도로 작아서 로스팅 기계는 없어도 원주민처럼 무쇠솥에 볶아내는 커피는 나름 동네에서 괜찮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 소문 때문에 매일 손님이 드문 밤에 커피를 볶느라 혼자 고생하는 중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나 싶으면서도 이미 이 커피맛에 길들여져 버린 단골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커피콩이 습도 영향을 많이 받는데 오늘 밤부터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하니 오늘 같이 커피 볶기 제일 싫은 날은 장날인 셈이다. 다 내 탓이다. 일찍 문을 닫자. 아니, 아예 커피 볶는 걸 때려치우자 중얼거리는데,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나 싶더니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 요"
"오랜만이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사실 거짓말이다. 고개를 들자마자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쳤다. 규호가 내 카페에 들어오는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 이런 시간은 아니었다.
"야, 너 뭐야."
대학교 졸업하고서 처음 봤는데도 단정한 차림과 달리 부스스한 머리라니. 여전하다.
"나 여깄는 건 어떻게 알았어?"
한쪽 입고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규호가 대답했다.
"인스타에 대놓고 '나이지리아식 커피 로스팅' 하면서 얼굴 내놓는 사람이 그걸 궁금해하면 안 되지."
그러니까 왜 하필 지금 오냐고.
"나 커피 볶는 중이었거든. 시작한 것만 금방 마무리할게. 뭐 마실래?"
"지금 되는 거 아무거나."
커피를 볶으면서도 뒤통수가 뜨겁다. 역시 오늘은 커피 볶을 날이 아니었다. 8년이다. 8년 만에 만나는 규호에게 보이는 얼굴이란 게 아주 화려하다. 마감 전 화장이 거의 다 지워져서 꾀죄죄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별로인데 무쇠솥 때문에 얼굴은 벌겋게 올라와 있었다. 아니다. 차라리 얼굴이 이미 벌건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다크 로스팅을 할 생각이었지만, 급하게 미디엄 로스팅으로 끝내고 방금 볶은 커피를 갈아내면서 생각했다. 규호는 항상 저런 식이다. 언제 어떤 순간에라도 주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뻔뻔함은 여전했다. 저게 좋아서 졸업 직전까지 규호를 짝사랑했지만 인기가 많았던지라 규호의 베스트 프렌드 자리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것도 졸업식 이후 규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끊어져 버렸다.
대학 생활은 매일 같이 지루했다. 말 뿐인 말들을 주입식으로 밀어 넣는 지식 공장이 도대체 왜 필요한 지 몰랐지만 나는 남들이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놀수' 나 '놀금' 없이 수강신청을 했다. 하나는 엄마, 또 하나는 지수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거슬렸다. 엄마는 아빠의 오랜 바람으로 이혼한 후부터 나를 본인의 남편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예의 바르면서 자기에게는 독설을 내뱉는다며 악다구니를 썼지만 나에겐 모두 관성 같았다. 나의 성격, 성적, 옷차림, 말투, 엄마를 대하는 태도까지 모든 것을 엄마의 걸림돌처럼 여겼으면서 애교 많은 아들을 원하다니. 그나마 내 자식 교육의 필요성은 느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엄마는 투정을 빙자한 간섭을 부릴 수 있는 조건으로 대학 등록금 내주겠다고 했고, 나는 바로 학자금 대출을 받아버렸다.
"지 아빠 같은 놈."
학자금 대출을 받은 후 엄마가 한 이야기였다. 욕인지 칭찬인지 알 길이 없이 바로 알바 자리를 알아봤다. 엄마, 학교, 일. 인생은 재미없는 것 투성이었다.
그때 만난 게 지수였다. 개강 파티에 가느니 알바나 한 시간 더 하려고 몰래 빠져나오다가 똑같이 뒷길로 빠지는 지수를 발견한 게 시작이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비슷했던 지수와 나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미술관, 비 내리는 날 카페, 그리고 재즈.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잘 맞는 생명체가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수는 틈만 나면 내가 일하는 카페에 놀러 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커피 하나 시켜서 마시며 책 한 권을 읽고는 가버렸다. 그러고는 꼭 커피 반납 쟁반에 무언가를 남기고 갔는데, 과자, 껌 같은 간단한 것도 있었지만 가끔은 내가 좋아할 만한 공연이나 미술관 팸플릿을 올려놓고는 가고 싶은 날짜를 써놓기도 했다. 갈 수 있다고 문자를 남기면 신나서 스케줄을 짰고, 못 간다 그러면 같이 가자며 조르는 통에 언제나 내가 지고는 했다. 남들이 매번 우리에게 사귄다고 수군댔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손사래 치기 바빴다. 등록금 벌기 바쁜 내가 무슨 시간이 있을까. 사실 이 정도면 지수를 좋아했어야 했지만 그럴 맘이 들지는 않았다. 괜히 지수랑 사귀었다가 헤어지면 못 보는 게 무서워 으레 그런 마음이 들기도 전에 황급하게 덮어버렸다. 이런 나의 비겁함을 알고 있던 지수가 하루는 커피 쟁반을 반납하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반쪽아. 너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나한테 와서 검사받아라. 여자애 불쌍하니까 너무 착하면 내가 안된다고 얘기해 줄게."
"걱정 마. 내가 너보다 더 잘 맞는 사람 만나면 질투나 하지 마."
나 같은 놈한테 이런 얘길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졸업하고서도 지수랑은 연락하고 지내야지, 마음으로 다짐했지만 그건 내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졸업을 하자마자 엄마의 집착은 도를 넘기 시작했다. 취직준비 한다고 집에 있는 꼴도 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밖에 나가서 면접이라도 볼라 치면 자기를 떠나가려고 한다며 온갖 방법으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 와중에 생각나는 건 지수뿐이었지만, 지수는 나이지리아식 커피를 배우고 있다며 연락이 거의 두절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기어이 내 핸드폰에 손을 댔다.
"지수가 누구야? 네 여자친구지. 그렇지? 네가 어떻게 날 떠날 수가 있어!"
엄마는 내 핸드폰을 망치로 내려쳐 버렸고, 나는 그날 밤 엄마가 잠드는 모습을 보고 바로 집을 나가 학교 근처 모텔에서 며칠을 지냈다. 아는 곳이라곤 학교 밖에 없는 나도 한심했지만, 그곳에서 부를 수 없는 지수를 떠올리는 것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마음으로 모텔에서 일주일을 넘게 지내다가 문득 겁이 났다. 점점 지갑은 얇아졌고, 내 방 침대가 그리워졌다. 친척집도 아빠에게도 갈 수 없는 내가 결국 다시 엄마 집으로 돌아갈까 무서웠다. 어떻게든 엄마가 나를 찾을 수 없는 곳, 내가 엄마에게 찾아가기 어려운 곳을 생각하다가 무작정 제주도로 향했다.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엄마와 가장 먼 곳이 제주도였다. 돈은 많이 벌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노인 인구가 많은 곳이니 어디든 쓰임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확실히 제주도는 제주시를 벗어나니 손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무급으로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면서 주변에 일할 곳을 찾아보다가 귤 수확, 귤 가공업체, 생선 손질, 호텔 청소까지 온갖 일을 해댔다. 시골까지 와서 손 덜어줘 고맙다는 엄마 또래 아주머니들과 일을 하며 엄마에게 바라던 적절한 관심과 무관심 또한 받을 수 있었다. 애교 많은 아들이 아닌, 그저 그 순간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이곳에서도 재미는 없었지만 숨통은 트였다. 적어도 그들이 나에게 바란 건 힘쓰는 작업자지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제주도에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지지 않은 복병이 하나 있었다. 지수. 일하다가 지칠 때면 지수가 들고 오던 커피 쟁반 위 쪽지가 생각났다. 같이 미술관 가자고 꼬시는 사람이 없는 내 인생은 아무 맛이 없었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서 탈출한 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수에게 발목이 잡혀 버린 거다. 제주도의 풍경 좋은 곳에 있는 카페를 볼 때면 그곳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제주도 곳곳이 좋은 풍경이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카페가 있으니, 일을 하지 않는 모든 시간 동안 지수를 떠올리는 것, 지수의 인스타그램을 찾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카페 안에서 커피를 볶는 지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모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수가 내 제주도 도피 생활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전화 한 통이 왔다.
"너 지금 뭐 해."
얼음 가득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며 규호에게 물었다.
"나 제주도 살아. 졸업하고서 얼마 안 있다가 넘어갔어."
"뭐? 너 제주도에 친척 있었어?"
"없어. 그냥 가고 싶어서 간 거야."
"근데 왜 얘기도 안 하고 간 건데."
"내가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네가 나이지리아에 있어서 못한 거잖아."
"내 번호 없냐."
"핸드폰 잃어버려서 전화번호부 다 없어졌어."
"백업도 안 했냐 이 화상아. 그럼 서울은, 놀러 온 거야?"
지수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물어봤다.
"엄마 장례식."
"어?"
"엄마가 좀 아팠더라고. 몸인지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몰랐어."
"그 얘길 왜 이제 해?"
"뭐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우리 엄마 너 안 좋아해. 너 왔으면 살아 돌아와서 괴롭혔을걸."
"그래도 그렇지."
"저는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아무튼 자기 얘긴 절대 안 하지."
"내가 그랬나?"
"그래, 이 무심한 놈아. 어디에 모셨어? 한 번 같이 가."
"나 밤비행기 타고 돌아가는데."
"야!"
지수가 소리를 질렀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 제일 남고 싶은 사람은 나라고.
"저도 출근이란 걸 해야 합니다. 그래도 영광인 줄 알아. 서울에서 따로 만난 사람은 네가 유일해."
내 대답에 문득 생각에 잠기던 지수가 유리컵에 맺힌 이슬을 닦아냈다. 뭔가 할 말이 있을 때 하던 버릇이다.
"지수야, 나 이제 갈게."
"벌써?"
"너 커피 볶아야지. 내가 연락할게."
"진짜지. 너 진짜 연락하는 거지?"
"한다고. 나 니 인스타 안다니까."
지수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눈을 가늘게 뜬다.
"자, 반쪽아. 가기 전에 한 번 안아보자."
커피 향 가득한 지수를 으스러지도록 꽉 안았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커피를 챙겨주려는 지수를 겨우겨우 카페 안으로 밀어내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탔다.
"어서 오세요! 어디 가세요?"
"김포 공항이요."
"금방 비가 쏟아진다니까 조금 천천히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어이고 커피 향이 좋네요."
택시 기사님이 문득 말을 꺼내온다. 온몸에서 커피 냄새가 난다. 이제 커피 냄새만 나도 지수가 생각나게 생겼다. 큰일이다.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지수 말대로 너무 착한 여자애는 내 옆에 있으면 불쌍하다. 이윽고 택시 창을 토독 토독 때리는 빗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를 볶던 지수가 멍하니 비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는 것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