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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한로로

by 윔지테일

1cm가 겨우 넘을 것 같은 까만 줄 하나가 내 머릿속 소재처럼 깜박거리기만 한다. 하얗기만 한 워드패드 새 파일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를 보면서도 이제는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몰라 속절없이 시간은 축내고 있었다. 소프트웨어 살 돈도 아까워 워드패드에 글을 쓴 게 몇 년 째인지 모르겠다. 잘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글을 쓰겠다고 엄마 집에 들어와 내 몸 하나 누일만한 작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산 기간부터 계산하자면. 거의 5년은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고 나서야 어린 날의 성공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느끼는 거다.

글쓰기는 취미일 뿐이라던 사람들의 말에 발끈해 블로그에 수기처럼 계속 글을 올리다가 한 출판사의 눈에 띄어 책을 출간했었다. 이게 그러면 안 됐는데, 생각보다 책이 잘 팔렸다. 베스트셀러까지는 아니지만, 출판사에서 사인회 한 두 번 열기는 괜찮을 정도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책이기는 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사인을 받겠다고 길지 않은 줄을 서고, 글을 읽고 팬이 되었다는 말을 하는 건 그 어떤 꿀보다도 달콤했다. 첫 인세로 중소기업 대리 월급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성적에 맞춰 간 대학, 인파에 휩쓸려 들어간 회사였다. 글로 돈을 벌 수 있다고 느낀 순간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겠다는 희열에 회사를 그만뒀다. 내 글이 사람들의 공감을 받은 건 바로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썼기 때문이란 걸 까먹고.

회사를 그만둬 버리니 사람들의 공감을 살만한 글을 쓰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이제는 작가 이름이 붙었으니 블로그나 끄적거리는 건 그만해야겠다는 안일한 생각까지 더해져 내 책을 보고 유입되던 수많은 방문자들도 점점 심드렁해져 버렸다. 첫 인세 이후로는 거의 아르바이트비도 안 되는 돈만 들어오는 인세 통장, 겨우겨우 50페이지 정도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내는 것마다 '공감대 형성 부족'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건 이제 필수가 되었다. 점점 바닥나는 통장 잔고와 어느샌가 사라진 퇴직금에 화들짝 놀라 다시 취직을 하려고 보니, 나는 아무 이유 없이 3년을 일하지 않은 백수가 되어 있었다. 중소기업에서 대리 달고 일하다 갑자기 일을 그만둬 버린 3년 백수. 이런 사람의 이력서가 받아들여지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웠다. 결국 한국인이라면 서울에서 살아야지, 하는 오만함에 직장을 그만두고서도 유지하던 월세방은 보증금도 받지 못한 채 방을 빼고 지하철도 없는 경기도 구석에 자리한 조그마한 연립 주택 엄마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한 자도 제대로 쓰지 못한 워드패드 창을 바라보다 방문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노트북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따뜻하다며 억지로 내 방에 밀어 넣은 엄마표 분홍색 꽃무늬 이불에 몸을 말아 넣었다. 제발, 오늘은 제발 그냥 자게 놔둬. 하며 속으로 중얼거린 내 기도가 무색하게 방문이 열렸다.

- 언제까지 잘 거야?


판교에 있는 회사 건물 청소 도우미로 일하는 엄마는 매일 아침 6시면 출근했다가 대형마트로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왔다. 건물 청소는 생각보다 돈을 많이 줘서, 대형 마트는 퇴근 전에 떨이로 파는 반찬을 직원가로 더 싸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어차피 마트 월급을 고스란히 반찬값으로 준다나 뭐라나. 엄마가 어디에서 일하건 관심은 없었지만, 제발 새벽까지 글 쓰고 누워있는 아들을 출근 전에 깨우는 악취미는 제발 그만뒀으면 했다.


- 엄마. 나 방금 누웠어요.

- 글 잘 쓰는 작가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글 쓴다더라. 하고픈 대로 살면 어떻게 글이 나오니? 글은 괴로워야 잘 나와.

- 그만 좀 해요. 아침에 글 쓰는 사람이 새벽에 쓰는 사람보다 괴롭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예요.

- 아무튼 맘에 안 들어.

- 잘게요.

- 냉장고에 반찬 넣어 놨어. 어제 마트에서 부대찌개 키트 세일하길래 사놨으니까 끓여 먹던가.


일부러 내 방문을 쾅 닫은 엄마는 옆집 사람도 나처럼 일어나길 원하는지 온갖 소음을 내면서 현관문을 잠그고 발망치로 계단에 못질을 해대며 사라졌다. 엄마가 시야와 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화가 나서 분을 삭일 방법이 없었다. 이미 충분히 괴로운 사람을 무슨 호강에 겨운 백수 취급을 하다니. 하지만 그런 생각들에 화가 난 것도 잠시, 밤샘을 이겨낼 수 없던 눈 두 덩이는 세상과 나를 잠시 차단하며 깊은 잠으로 끌어 들었다.



광화문 대형 서점에서 사인회를 열던 꿈에서 깨어나게 된 건 가열찬 핸드폰 알람 때문이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나 생각하며 눈을 떠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딱히 기상 알람을 맞춰놓지는 않았지만, 1시쯤 되면 오픈채팅방에서 엄청난 메시지가 쏟아져 나왔다.


- 기상하세요!

- 이제 차 한 잔 내리고 글 쓸 시간입니다.

- 모레님은 오늘 아침 7시에 잠든다 했으니 좀 기다려야 할 듯.


다들 나처럼 새벽에 글 쓰는 사람들의 익명 모임이었다. 서로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니다. 목적은 '나 혼자 글 쓰고 있는 건 아니다, '라는 위안이랄까. 방에 틀어박혀 글만 쓰는 사람들의 공감대 형성이라도 하고자 만들어진 그룹이었다. 직장도 그만둔 나의 유일한 사회생활이기도 했다. 활발하게 채팅을 이어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존재감은 있었다. 오픈 채팅방 고인 물에 가끔씩 올라오는 글에 대한 고민에도 괜찮은 답변들을 늘어놓은 덕이었다. 보통 그 조언들의 출처가 출판사한테 까일 때 들은 이야기들이긴 했지만.


- 덕분에 오늘도 기상했습니다. 밥 먹고 글 쓸게요.


채팅방에 글 하나 남겨놓고는 잠깐 인터넷 서핑을 좀 했다. 아무래도 행동반경이 정해져 있다 보니 사람들의 트렌드를 읽을 방법이 인터넷 밖에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따돌림 안 당하려고 억지로 보던 드라마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직장인 커뮤니티나 소위 '짤'이라고 부르는 유머들을 조금 둘러보느라 시간을 좀 허비했다 싶을 때 기다리던 모모님의 채팅이 핸드폰 상단에 떠오른다.


- 새벽글쟁이님 또 인터넷 서핑한다고 누워 계신 거 아니죠?

- 앗! 들켰네요. 일어나겠습니다 ㅎㅎ


모모님은 약 1년 전에 오픈채팅방에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기롭게 들어왔다가 절필을 선언하고 나가기도 하는 곳이라 부침이 있어 정 붙일 사람이 없기는 했지만 모모님은 특별했다.


- 새벽쟁이님 식사 거르시는 거 아니죠?

- 새벽쟁이님은 채팅에서도 이렇게 무게가 느껴지니 진짜 글은 얼마나 깊을까요.

- 익명 그만하고 새벽쟁이 님 무슨 책 썼는지 알려주시면 안 돼요?


내가 가볍게 혹은 진지하게 보내는 채팅에 모모님은 반드시 긍정의 답변을 해줬다. 그 말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익명 채팅방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할 수 있다면 실제로 만나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저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 매일 상상해 봤지만 비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도 없었다. 성별, 나이, 생김새까지. 그 어떤 연예인 얼굴에 비교해 보아도 딱 알맞게 맞춰지는 인물을 찾기 어려웠다. 어떤 얼굴과 표정으로 나를 응원했을까. 모모님이 실제로 저 말들을 하는 걸 듣고 싶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잘 될 거라는 긍정의 말을 들은 게 언제였던가. 예전에는 긍정적인 말은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이며 실제로 효용 가치가 있는 채찍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칭찬 한 마디 못 듣는 상황에 여러 해 노출이 되다 보니 긍정적인 말에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느끼고 있었다. 모모님의 등장으로 내가 글을 쓰는 목표가 바뀌었다. 반드시 좋은 책을 출판해서 당당하게 모모님에게 소개하고 얼굴을 보는 것. 목표를 그렇게 설정하고 나니 주제를 찾아다니는 것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글을 쓰려고 책도 닥치는 대로 읽고 있었다. 밥 먹는 시간에 책을 못 읽는 게 아까워서 오디오북을 듣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글이 잘 써지는 건 아니었지만.


침대에서 빠져나와 냉장고를 열었다. 엄마가 말한 대로 할인스티커가 세 장이나 붙은 부대찌개 키트가 냉장고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늘 먹지 않으면 키트 안에 있는 콩나물은 내일 당장 물러질 게 뻔했다. 엄마가 돈을 아끼겠다며 사 오는 반찬들은 며칠 내에 쉰 내가 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들 천지였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걸 사 오라고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백수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리고 키트에 있는 온갖 것들을 냄비에 들이부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으로 오디오북 어플에 들어가서 신작이라고 올라온 오디오북을 하나 재생 시켰다. 포근한 노란색 바탕에 빌딩을 올려다보는 뽀글 머리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그려진 표지가 맘에 들어 제목이나 저자도 보지 않았다. 요새 유행하는 무슨 편의점 어쩌고 하는 소설의 스핀오프인가 싶었다. 오픈채팅방 알람 소리 때문에 작가가 누군지는 못 들었는데, 내용을 보니 평범한 직장인 엄마의 수기였다. 책 제목이나 작가는 잘 보지 않았는데 최대한 선입견을 만들지 않기 위해 표지만 보고 읽기 시작하니 생기는 문제였다. 최대한 많은 글감에 노출시키려는 나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듣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책을 읽으면 되고, 저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는 거니까. 요새 수필이 참 많이 나오는데, 나이가 꽤 있는 평범한 엄마의 수필은 오랜만이었다. 다들 내가 잘났다, 소리만 가득하는데 본인의 평범하지만 고통스러웠을 본인의 삶을 담담히 써 내려간 서두가 마음에 들어 끝까지 듣기로 마음먹고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운 부대찌개 냄새에 이끌려 키트에 같이 들어 있던 라면 반 개를 집어넣을 참이었다.

그런데 차분히 오디오북을 듣기엔 핸드폰 알람이 오디오북을 듣기 어려울 정도로 울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글도 안 쓰고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알람을 끄려고 봤더니 그 짧은 시간 안에 오픈채팅방 알람이 100개가 넘게 쌓이고 있었다. 아마추어 글쟁이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열띤 반응이었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는 모레님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났을 게 뻔했다. 보통 이런 반응은 절필이나 출판. 극과 극의 상황이었기에 오디오북을 잠시 멈추고 어느덧 200개를 넘긴 채팅방에 들어가 봤다.


- 축하드려요!

- 도대체 누구지?

- 저건, 정말 사랑이네요.

- 누군지 몰라도 재능을 물려받았네. 부럽다.

- 아. 저런 분도 뚝딱 글 써서 책 내는데 나는 뭐지?

- 무슨 일이에요? 채팅이 200개를 넘겼어!

- 스크롤 못 올리겠어요. 누가 상황 설명 해주실 분!!!

막 들어온 신참 급의 멤버가 사진이 딸린 채팅을 연결한 다음에 거기에 답글을 썼다.


- 모모님이 책을 냈대요! 근데 너무 감동적.


책을 낸 걸 축하하는 게 아니라 감동적이라고? 그리고 책을 쓴 게 모모님이라고? 급하게 연결된 글을 눌렀을 때, 정말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떤 상황에 놀라 힘이 풀려 물건을 놓치는 게 영화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되니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모두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갑작스럽지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도 나가기 전에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짧게나마 글을 씁니다.

저는 글과는 아무 상관없는 평범한 집의 엄마예요. 사실 글을 쓴다는 건 저에게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죠. 그런데 제 아들이 꽤 오랫동안 글을 쓴다고 고생하고 있는데 제 눈에는 그저 노닥거리는 걸로 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그러다가 아들을 이해하려면 제가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일기 쓰듯이 차근하게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일을 하느라 바쁘니 시간 내서 글을 쓰기는 어려웠는데. 우연히 글쓰기 방법을 고민하는 이 오픈채팅방을 알게 되어 들어오게 되었어요. 여러분들 덕분에 블로그라는 것도 알게 되고, 거기에 꾸준히 저의 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방문자 늘리는 방법도 알려주셔서 참 고마웠습니다.

막상 쓰고 보니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것도 잘 모르면서 제가 아들을 너무 책망만 하지 않았나,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 글을 눈여겨본 출판사에서 제 일기들을 엮어 책으로 내자고 제안해 오셨어요. 사실 이해할 수 없었죠. 저는 잘 쓰지도 못하는데 왜 저 같은 사람의 글을 팔려고 하나 싶어서요. 저의 물음에 제안을 하셨던 편집자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건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게 하는 누군가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내서 저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예요. 아들을 이해할 수 있는 큰 일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을 내게 되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에게 이 얘기를 어떻게 해줘야 하나 난감하기도 합니다. 아들이 새로운 책을 내면 그때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아들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이 책이 저의 인생을 바꿀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여러분들의 간절함에 제가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나가는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 저는 다시 블로그에 일기를 쓰는 평범한 엄마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언젠가 우리 어느 날 글로써 마주 볼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랍니다. 그때까지 모두들 건강하세요. 김미자 드림.


엄청 긴 메시지와 함께 딸려온 사진은 포근한 노란색 표지에 마트가 그려진, 내가 지금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던 책 표지였다. 그리고 표지에 찍혀 있는 저자를 보고는 손에 힘이 풀리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노란 표지 위 책 제목에 눈길이 간다. <나는 빌딩 청소부입니다>. 책 제목 위로 모모님의 채팅 메시지가 팝업창으로 떴다.


- 모두들 감사했어요.


저 말 한마디와 함께 '모모님이 채팅방에서 나갔습니다.'라는 안내가 뜨며 모모님이 사라졌다. 갑자기 코끝에 짠내가 진동을 했다. 놀라서 가스레인지로 가니 부대찌개가 거의 조림이 되어 있었다. 보글거리다 못해 자작거리는 소리를 내는 부대찌개에 다시 물 한 컵을 들이부은 후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내 마음을 한 번 식히듯이. 아까 듣고 있던 <나는 빌딩 청소부입니다>의 서문을 다시 재생시키며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책에 대한 답가를 쓸 차례인 것 같다.

- 여전히 새벽에 몸을 일으키는 건 어렵다. 차라리 눈을 뜨는 게 어려웠으면 좋겠는데, 익숙해질 듯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근육통은 그 어떤 알람시계보다도 정확하게 기상 시간을 알려준다. 나는 빌딩 청소부다. 언제나 양복을 빼입고 담배와 커피를 물고 있는 그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용하지만 빠르게, 하지만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 나의 평생은 그렇게 조용하게 누군가의 뒤에 서 있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아들에게, 그리고 일에서도. 어느 순간 누군가의 뒤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한 내 일상을 불쌍하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걸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들을 쓴다. 밥 해달라는 말만 반복하다 일찍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 아직도 나의 뒷바라지를 바라는 아들, 그리고 여전히 나의 흔적을 지워야만 하는 나의 일상을 보며 이 책을 읽는 당신들 주위에 있는, 당신들을 위해 본인의 흔적을 지우는 누군가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입춘> 한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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