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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세탁기_1. 불림

<빨래> 이적

by 윔지테일

온갖 행복을 저장하는 항아리 같은 배가 침대 가장자리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침대에서 조금만 벗어났다간 배와 함께 내 몸도 고드름처럼 뚝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닫힌 눈꺼풀을 뚫는 미세한 빛을 느끼며 이불에 덮인 팔을 빼 배에 손을 갖다 댔다. 취침 전 맥주가 습관이 된 이후 한 번도 따뜻했던 적이 없는 아랫배가 따끈하게 데워진 게 괜히 기분이 좋았다. 잠결에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한 게 아침 7시였으니 아마 11시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잠은 반쯤 깨 있었지만 굳이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밤새 온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다 겨우 세상과 휴전한 이 시간을 이렇게 끝내긴 싫었다. 하지만 암막 커튼 사이를 기어이 비집고 나온 햇빛 한 줄기가 내 배를 정확하게 노리며 잠을 깨우고 있다. 이 이상 같은 자세로 누워 있다가는 산 채로 구울 태세였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떠 몸을 옆으로 돌리니 내 퀸 사이즈 침대 옆에 붙어 있는 작은 트윈 침대가 눈에 찼다. 하얀색 이부자리가 이미 네모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게, 해원이는 이미 나간 듯했다.


해원이는 어느 순간부터 토요일 아침이면 나갔다가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들어왔다. 작은 소도시에서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지라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 참견하기 좋아하는 옆 자리 김 대리 말로는, 해원이가 토요일 아침마다 사무실촌 카페에서 혼자 노트북으로 뭔가를 한단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다고. 가끔 영어 수업을 하는지 노트북 화면을 보며 영어로 떠들어 대기도 하고, 디카페인 카페라테 하나로 몇 시간이고 타자를 두드린단다. 점심은 그곳에서 파는 햄치즈 샌드위치로 때우고 저녁이 되기 전에 주린 배를 안고 들어오는 거다. 해원은 토요일마다 가는 카페의 주인이 김 대리 와이프 가게인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코딱지만 한 시내에서 익명성 같은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얼굴에 철면피를 깐 걸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거냐고 채근하는 김대리에게 "자기 계발한데." 하고 말았지만 그 속을 알 방법이 없다. 아니, 해원과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눈 기억조차 벌써 희미하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다 일어나 암막 커튼을 걷어냈다. 갑자기 내리치는 햇살에 고개를 방 안으로 돌렸다. 안방은 엉망이었다. 언제 신은 건지 기억도 안 나는 잔뜩 뭉쳐진 양말들부터 거뭇한 얼룩이 보이는 청바지, 벗어놓은 모양 그대로 주름져버린 땀에 절은 웃옷들이 한가득이었다. 한쪽 구석에 내몰린 아기 이불 세트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회색빛 먼지에 덮여 색깔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온갖 것들이 널브러진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앉던 먼지가 나의 손짓 하나에 폭풍우처럼 소용돌이쳤다. 대화가 없어진 이후로 해원은 집안 정리를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 흔적을 정리하는 걸 그만뒀다.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해원이의 유일한 단점이 정리 정돈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원이 내 물건에 아예 손을 대지 않으니 그동안 정리 정돈을 막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게 실감 났다. 지금도 해원의 물건들은 작은 립스틱 하나까지 군대 모포처럼 각이 잡혀 있는데 내 물건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내가 지나간 모든 자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해원이 자리를 비운 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손으로 침대를 밀어내는데 손목에서 관절 소리가 난다. 쿨하게 손목 몇 번 털어주고 한쪽 구석에 있는 해원의 빨래바구니를 끌어다 내 빨래를 모으기 시작했다. 요새 해원이 나한테 하는 유일한 말이 "내 빨래 건들지 마." 였는데 우습게도 나는 그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물론 그 말을 듣기 위해 빨래를 하는 건 아니다. 내 빨래를 처리하며 전하는 무언의 반성이었다.


그저 싸다는 이유로 샀던 통돌이 세탁기에 빨래를 집었다. 이제는 바구니에 쌓인 빨래만 봐도 세제 양이 금방 가늠이 됐지만, 처음에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해원에게 조심히 물었다.


"그, 빨래하려고 하는데 세제 얼마나 넣어야 해?"

"세제통에 쓰여 있잖아."

"아니, 그래도 봐줘. 나보단 자기가 더 잘 알잖아."


그 말에 해원은 고개를 살짝 들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 기억 속 반달 모양의 웃음 짓던 눈매는 흔적도 없이 그저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뭐 처음부터 다 알았어? 왜 다 나한테 물어?"


왜 나는 해원이라면 뭐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무심한 듯 익숙하게 세제를 세탁기에 털어 넣었다. 예전 같으면 야무지게 산소계 표백제에 섬유 유연제까지 넣었다고 해원이가 엉덩이를 토닥여 줬을 텐데. 세탁기 뚜껑을 닫고 시작 버튼을 누르자 세탁기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빨래는 세탁기에 맡기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무 생각 없이 SNS를 한다고 누워있던 주말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지금은 유튜브 릴스를 계속 보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연애할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해원을 처음 만난 건 거래처 사무실에서였다. 해원의 직장은 손가락만 한 볼트나 나사 같은 공구를 만드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까다로운 요구가 많은 주문처 담당, 해원은 그 비용들을 처리하는 경리. 별로 부딪힐 일이 없는 관계이기는 했지만, 작고 영세한 제조공장에서 해원에게 경리만 시킬 리가 없었다. 가끔은 영업 담당자랑 같이 나와 물건을 납품하기도 했고, 비용 지급이 하루라도 늦으면 어김없이 나에게 전화해 입금을 독촉했다. 처음에는 공급자가 뭐 이렇게 까다롭나, 싶었지만 몇 달이 지나고서는 해원의 요청이 오기도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지만 그게 호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칼 같은 사람. 그게 해원의 첫 이미지였다.


그날도 해원은 영업 담당과 함께 물건 납품을 하러 왔다. 하필 내가 팀장에게 대차게 까이고 있을 때. 아마 건물에 들어설 때부터 팀장의 고함 소리가 비질비질 새어 나왔을 거다. 항상 영업 담당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해원은 그날따라 앞장서서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모두와 살갑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너무나 명량한 해원의 목소리에 팀장은 "이따 얘기해."라고 나지막이 속삭이더니 해원이를 반기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남자밖에 없는 시커먼 사무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가진 힘을 해원이는 너무 잘 알고 있던 거다. 그때부터였다. 해원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게.


이제껏 칼 같은 여자라고 여긴, 난공불락 같은 해원이한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싶었지만 방법이 뭐 있나. 잘해주는 수밖에. 처음에는 거래처에 갈 때마다 휴지, 사탕, 커피를 챙겨주다가 나중에는 일부러 점심 즈음에 가서 밥을 사주기도 했다. 눈치 빠른 영업 담당은 내가 점심을 산다고 할 때면 눈치껏 빨리 빠지거나 없는 점심 약속을 만들었다. 역시 결혼할 때 넥타이 하나 사줄 만했다.


해원도 바보는 아니었다. 법인카드인 척 내 카드를 열심히 긁는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하루는 나한테 대놓고 물어봤다.


"저 좋아하세요?"

"네? 어, 그러니까. 조금 당황스럽네요."

"예스, 노. 하나만 대답해요. 저 좋아하세요?"

"예...스."


뒤에 '스'는 왜 붙여.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다. 내 대답에 해원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금세 잠그더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점심 한 시간으로 뭘 하겠다고. 밥이나 먹고 말지. 주말에 봐요. 이번 주 토요일 시내에서 1시."

"예?"

"영화를 보든, 카페에서 대화를 하든. 어떤 사람인지 보자고요. 시간 다 됐으니 일어나죠."


해원은 티슈로 입을 한 번 훔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건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잡아야지."



<빨래>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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