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이적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도파민이 팡팡 터지는 유튜브 숏폼을 크게 틀어놨는데도 세탁기 안에서 물이 참방거리는 소리는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창문 열고 청소해야 하는데. 한낮의 햇살을 무시하는 듯 강렬하게 반짝이는 숏폼을 애써 외면하며 핸드폰 화면 끄트머리에 5 폰트로 쓰인 네 자리 숫자를 바라봤다. 12시 34분. 정말 잠깐 들여다본 핸드폰이었는데, 어느새 30분이 금방 지나 있었다. 깜짝 놀라 누운 채로 고개를 들었는데 근육이 놀랐는지 혀까지 아릿거린다. 먼지 많으면 빨래에 달라붙는다고 해원이가 그랬는데. 왼손으로 핸드폰을, 오른손으로 목을 주무르며 생각하다가 옆으로 길게 누워버렸다. 모르겠다. 세탁기는 아마 50분 더 돌테니 급하지 않다. 다시 1분짜리 시각적 마약의 세계에 들어가며 핸드폰 소리를 키웠다. 잠재우지 못하는 세탁기의 진동음을 다른 소리로 애써 가린다.
예전에는 세탁기에서 이렇게 여러 종류의 소리를 내는 줄 몰랐다. 내가 모르던 게 비단 세탁기 소리뿐일까. 정갈한 서랍 속 속옷들, 떨어질 줄 모르던 라면, 항상 깨끗한 식기들. 설거지가 싫어 일회용품을 사다 쓰던 자취 시절을 잊기에 충분했다. 그 모든 걸 당연하게 여겼으니까. 그래도 해원이 요리를 한다는 것만큼은 매번 냄새로 눈치챘는데, 그냥 그 모든 게 당연했다. 해원의 손을 거치는 것이면 그게 무엇이든. 하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해원이도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일상생활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무심하게 기회를 던져 준 해원의 제안으로 몇 번 데이트를 하고 나니 확실히 보였다. 그녀가 생각보다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해원이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화장이라곤 선크림이 끝, 노트북 백팩에 공장 지정 유니폼까지. 검댕이만 안 묻었지 공돌이 단벌신사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근무시간만 끝나면 칼 같던 냉혈한은 어디 가고, 맨날 어디에 두고 온 물건 위치를 떠올리느라 말간 얼굴이 멍하게 떠 있었다. 업무 때와는 다른 덤벙거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해원은 공략할 수 없는 미지의 성이 아니었다. 내 곁에 숨어 있는 나약하고 보호해주고 싶은 여자였다. 사람이 저렇게 허술하면서 일은 그렇게 정 없이 하나 싶었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것조차 매력이었다. 가끔 일하다 보이는 미세한 당황은 나만 발견할 수 있는 재미였다. 물론 그게 항상 신나는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은, 일상생활에 의구심이 들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해원은 외출할 때 집에 물건을 두고 오는 일이 잦았다. 지갑이나 핸드폰은 단골손님이었다. 하도 잘 잊어버리다 보니 자주 드는 가방들에는 똑같은 물건을 넣어 두었고, 한 번 쓰는 가방은 잘 바꾸지도 않았다. 데이트 나오는데 물건 빠뜨릴까 봐 회사 노트북 가방을 들고 나오니 말 다 했지. 그러다 보니 몇 개씩 사지 못하는 지갑과 핸드폰은 해원이 들고 나오는 가방 안에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 핸드폰을 두고 왔다며, 교통카드를 깜박했다며 데이트 약속을 10분, 20분 미루는 것도 익숙해져 갔다. 문제는 그 건망증이 꼭 중요할 때 터진다는 거였다.
때는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공항으로 운전하던 중. 해원이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하는 말이 집에 지갑을 두고 왔다는 거다. 내비게이션은 공항 도착 2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갑이 없다는 걸 지금 깨닫는 게 말이 되나? 이건 데이트가 아닌데? 진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무리 해원의 건망증을 알고 이해한다 해도 말끝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가 며칠 전부터 물건 리스트 작성해서 챙길 때 보라고 하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지갑을 두고 올 수 있는가!
"미안해. 리스트에 지갑 쓰는 걸 깜박했어."
어떻게 지갑을 빼먹을 수 있지? 아니, 그렇다고 어떻게 그걸 진짜 안 챙겨 올 수 있는 거지? 내가 답답함에 핸들을 때리며 소리를 지르자 담담하다 못해 태연하게 내뱉는 답변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기 카드 가지고 왔잖아. 그 카드를 써야 할 것 같아서 얘기했어. 미안해.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 같을 텐데. 난 자주 이러니까. 이럴 땐 대처방법을 빨리 생각하는 게 더 낫더라고. 진짜 미안해. 비행기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화내지 말고 가자. 응?"
너무 화가 나는데 해원의 말에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으니 더 따질 수도 없었다. 여권과 핸드폰을 챙겼냐고 겨우 화를 누르며 물었다. 다 챙겼다고 장담하는 해원의 말에 뭐랄까. '왜?'라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기분으로 신혼여행을 갈 수는 없었다. 아무 음악이나 틀어놓고 크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내 허벅지를 터트릴 것처럼 때리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화가 나면 무언가를 발로 차곤 했는데 운전 중에는 그럴 수 없었으니까. 신기하게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해원이가 뭔가를 두고 다닌 게. 그 뒤로 해원이가 지갑과 핸드폰을 두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가끔 고데기를, 또 가끔은 가스불을 끄지 않은 것 같다고 불안해해서 돌아간 일도 있었지만 항상 잘 꺼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해원이 표정이 어땠지? 그다음에 공항에서 뭐라고 했더라? 이상하게 그 이후가 기억나지 않는다.
1분 중독에 얼마나 빠져 있었던가. 영상 한 개라도 더 보겠다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눈이 너무 뻑뻑해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 가운데에 있는 동그란 전등 커버 중앙에 새까만 점들이 모여서 하나의 작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망할 놈의 벌레들은 왜 불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갈까. 결국 저렇게 죽어버릴 텐데. 야행성이면 야행성답게 어둠을 쫓아갈 것이지 왜 빛을 보면 환장하는지 모르겠다. 검은 점들을 보니 예전에 복사기 토너를 갈다가 검은색 파우더를 잔뜩 뒤집어쓴 일이 떠올랐다. 그 옷이 어디 있더라. 얼룩이 안 지워진다고 해원이가 고생했는데. 가만히 옷 위치를 떠올리는데 문득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 뭐지. 내가 뭘 기다리고 있었더라. 아! 빨래!
세탁실에 들어가 보니 온몸을 덜덜 떨던 세탁기는 어느새 고요에 들어갔다. 문 너머 부엌에 걸려 있는 시계 시침은 2와 3 사이에서 톱니바퀴가 다음 순서로 넘어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세탁기가 다 돌고도 거의 한 시간이 지났다. 다시는 빨래를 세탁기에 방치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되어 버렸다. 급하게 세탁기를 열어 빨래를 바구니에 다시 넣기 시작했다. 물 먹은 갈대처럼 세탁기 통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는 빨래에서는 아직 깨끗한 향이 남아 있었다. 몇 달 전에 호기롭게 세탁기를 돌렸다가 까먹고 RPG 게임을 몇 판 한 적이 있었는데, 밤에 돌아온 해원이는 세탁기를 열어보고선 나에게 온갖 말을 쏟아부었다. 해원은 최대한 단어를 골라 쓴 것 같았지만, 말투는 세상 그 어떤 때보다도 분노에 차 있었다.
"뭐 하자는 거야? 내가 빨래하랬어?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 일을 두 번 시켜. 네가 와서 냄새 맡아봐. 그냥 하던 대로 해. 제발 손대지 마. 나 너한테 아무것도 안 바라니까."
해원은 걸레 냄새가 풀풀 나는 빨래들을 세탁기에서 다 꺼내서 탈탈 털어내고는 다시 세탁기에 넣는 일을 반복했다. 내 잘못이니 내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그저 거절이 가득한 눈빛만 받고 뒷걸음질 쳤었다. 이제는 그런 실수 안 하는데. 나 빨래 잘하는데. 청소도 잘하는데. 아차. 청소기도 돌려야 하는데. 어쩌나. 빨래 널기 전에 청소를 했어야 했는데. 숏폼의 굴레가 이렇게 무섭다. 빨래에 먼지가 쌓이는 게 낫나, 아님 냄새가 나는 게 낫나. 먼지보단 냄새가 더 티가 나니. 역시 청소를 미루는 게 현명하다 싶다.
"에이. 다 마르면 열심히 털지 뭐."
그렇게 세탁기의 회전력에 눌려버린 빨래는 바구니에 담겨 먼지 쌓인 바닥에 또 다른 길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