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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세탁기_3. 헹굼

<빨래> 이적

by 윔지테일

"진통제 하나 주세요."


'약'이라고 빨간 글씨로 크게 쓰인 유리문 하나 밀어낼 힘이 없었다.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몸에 온갖 체중을 실었다. 문이 열리면서 작게 바람이 일더니 씁쓸한 약국 냄새가 갑자기 온몸을 휘감았다. 약 냄새만 맡았는데도 갑자기 몸이 덜 아픈 것 같다. 어서 오라는 약사의 인사를 받아주지 못하고 약부터 찾는 게 미안했지만,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젯밤부터 아랫배가 묵직하게 땅끝까지 끌어내려지는 느낌에 설마 했는데. 기어이 생리가 시작됐다. 그런데도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생리대는 챙기고 진통제는 잊어버린 거다. 열개 들이 진통제면 하루는 너끈히 버티는데, 이놈의 건망증 때문에 한 두 개씩 남은 진통제가 침대 옆 서랍장에 몇 통 째 쌓여 있다. 아니, 사실은 그 서랍을 열어보기 싫은 걸지도 모르겠다. 쓰다 남은 임신 테스트기와 주삿바늘을 버리지도 못한 채 쌓아두고 있으니까. 진통제는 죄가 없는데. 이따 자기 전에 하나는 꼭 비워야지. 걸어서 5분이면 집이지만 그럴 정신도 없거니와 들르고 싶지도 않았다.


토요일마다 집 밖을 헤매는 것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동석이와 같은 공간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다. 내 마음을 돌리겠다고 이것저것 손대는 모습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던 마음에 집채만 한 파도가 일었다. 주말이면 피곤하다며 남산 같은 배를 내밀고 늘어져 있던 게 무색할 만큼 청소니 빨래니 만지작대는 걸 보면 지난날의 내가 답답하고 한스러워졌다.


"매번 생리 때마다 아파서 어떡해."


내가 항상 먹는 파란색 진통제를 건네는 약사의 걱정 어린 말에 웃음이 났다. 매달 괴로워하는 나를 볼 때마다 동석이 하던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었다.




그날도 엄청난 생리통에 진통제를 때려 먹은 직후였다. 자는 동안 어떤 몹쓸 놈이 가시가 잔뜩 달린 골프공을 뱃속에 집어넣은 건지,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필이면 공장 납품 하러 가야 하는데 잔뜩 부푼 배는 언제 터질지 간만 보고 있고. 안 가자니 새로 온 영업 신입은 아예 초행길. 인상을 찌푸린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어리바리한 신입에게 내비를 찍어 건넸다. 그나마 신입이 트럭 운전을 할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했으면 곡예운전으로 신고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요동 쳤다. 운전병 출신이라는 신입의 센스 있는 운전에도 화가 솟구치는 걸 겨우 억눌렀다. 약기운이 빨리 돌던가 내가 돌아버리던가. 뭐가 됐든 빨리 일 끝내고 가자며 납품처에 들어섰는데,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망할 박팀장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야, 이 새끼야! 이거 어쩔 거야!"


저 아저씨 일은 괜찮게 하는데 입이 걸어서 문제다. 목소리가 조금 쉰 걸 보니 고함이 절정에 다다른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결말 볼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지금은 내 허리가 절단날 판이었다. 신입 놈은 눈동자만 요리조리 굴리며 내 눈치만 살피는 꼴이니 할 수 없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신입에게 문을 열어 달라 부탁했다. 어떡하냐는 신입의 입모양을 무시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열 발자국 넘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박팀장과 고개가 땅으로 박힐 것 같은 남자 하나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오늘 여기 납품 간다 그래서 팀장님 뵈려고 따라왔어요!"


정말이지 오글거리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었지만 효과는 꽤 있었다. 통짜 몸에서 가까스로 허리 위치를 잡아주던 박팀장의 손이 스르르 내려가더니 웃는 낯으로 나를 반기는 거다. 물론 귓속말로 그 남자에게 뭐라고 하는 건 잊지 않았지만. 박팀장을 겨우 벗어난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제야 그게 구매팀의 동석임을 알았다. 나는 동석의 고갯짓에서 느낀 고마움을 눈짓으로 답하면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 좋으라고 한 건 아니야.' 이 순간 내 머릿속에 들어찬 생각은 몇 개 없었다. 목소리 솔톤, 복통, 진통제, 망할 생리통, 그리고 내가 여자라는 사실.


"여자라는 성별은 권력이야.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건 알지만, 적당히 잘 활용하라고. 남발하는 사람보다 가끔 쓰는 사람한테 효과가 더 좋으니까."


이제는 이름도 잊어버린 대학 선배가 했던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도움이 됐다. 그저 순간을 모면하려 했던 것뿐인데 그게 남자친구를 물어다 줄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그 사건 이후로 동석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거래처 방문으로 왔다면서 커피니 과자니 잔뜩 들고 오기도 했고, 납품을 가기만 하면 동석이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메일로 서로 물건과 대금을 독촉하는 사이치고는 과하다 싶었는데, 점점 대접이 국밥에서 삼겹살로, 그리고 꽃등심으로 바뀌는 거다. 호의는 삼겹살까지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가 어느 순간 신입이 눈치를 줬다.


"대리님. 빼는 거예요, 아님 모르는 거예요? 저 밥 같이 먹기 민망해 죽겠어요."


신입의 볼멘소리를 듣고서 그게 호의가 아니라 추파임을 알았다. 어쩐지. 같이 밥 먹자고 하면 신입은 도시락 싸왔다, 선약이 있다며 그렇게 자리를 피하더라니. 그것도 모르고 공짜밥 얻어먹으라고 채근했던 내가 그렇게 민망할 수 없었다. 왜 남의 일은 잘 보면서 막상 내 문제만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지. 신입의 한 마디에 그제야 상황이 바로 보였다. 이건 내가 정리해야 하는 판이라는 걸. 자리에 앉아 회사에서 나눠준 노트를 한 장 찢었다. 얼기설기 제멋대로 찢어진 종이에 질문을 몇 개 휘갈겼다.




내가 동석에게 관심이 있나? 모르겠다. 하지만 싫지는 않다.

남들이 봤을 때 좋은 사람인가? 일 잘하면 좋은 사람. 책임감 있다.

같이 밥 먹으면서 거슬린 적이 있나? 식사 예절 때문에 인상 찌푸렸던 적은 없다.

동석이 신경 쓰이는가? 신입이 말을 한 이후 조금 달리 보인다.

혹시 개인적인 관심이 있나? 언감생심이라고, 궁금하긴 하다.

설마, 귀여워 보이나? 귀여움 보단 안쓰러움?

그렇다면 동석과 영화는 볼 수 있겠는가? 영화야 뭐.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가? 그렇다. 소심하게 밥만 사는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먼저 말 못 한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뭔가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나? 까짓 거.




오전에 납품 자재 스펙을 핑계로 혼자 동석의 회사에 갔다. 가면 점심 먹자고 할 거고, 둘만 있으니 이것저것 얘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순댓국 집이라니. 회사 근처 10분 거리에 음식점이 몇 개 없다고는 하지만. 이 가게 골목만 돌면 백반집도 있고 분식집도 있는데! 스테이크나 파스타를 바란 적은 없지만 하필이면 본인 회사 직원이 제일 많이 오는 순댓국집이라니! 동석과 같은 시커먼 회사 재킷을 입고 있는 아저씨들이 가득 찬 식당을 바라봤다. 건너편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던 사람이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 입으로 가져가 깨물자 아작하는 소리와 함께 채즙이 튀어나갔다. 맞은편에서 물을 따르며 순댓국을 주문하는 동석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순댓국을 먹다 치아 사이에 잔뜩 낀 들깨가루와 함께 데이트나 한 번 해보자는 얘기를 하라고? 음식을 가리는 건 아니지만, 거뭇한 잔재들이 껴 있을지도 모를 음식을 먹으며 이런 얘기는 할 수 없잖아. 잠깐. 신입 이 자식, 착각한 거 아냐? 이건 누가 봐도 거래처 대접이지, 무슨 사심이니.


괜한 헛다리에 혼자 민망해하고 있는데 동석이 냅킨을 뽑아 내 쪽으로 깔더니 바로 나에게 수저를 건넸다. 무심하게 잡은 수저 마디 끝에서 동석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때 난 분명히 봤다. 조금 황급하게 빼낸 손, 그리고 빨개진 귀. 신입아, 미안. 네가 맞았네. 뜨거운 순댓국에 좋아하는 양념장과 들깨가루를 포기하고 덩어리를 몇 개 건져먹으며 타이밍을 노렸다. 아니, 솔직히는 이 사람이 나한테 언제 얘길 꺼내나 지켜봤다. 그래도 남자가 먼저 얘기해야 그 자존심이 지켜질 게 아닌가. 그런데 저 남자, 무슨 생각인지 뚝배기 뚫을 기세로 숟가락질만 했다. 순대만 건져먹고 끝난 내 식사는 아랑곳 않고.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고 한참을 바라보다 그냥 한 마디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을 깰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저 좋아하세요?"


흔들림 없이 뚝배기와 마주하던 그의 숟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네? 어, 그러니까. 조금 당황스럽네요."

"예스, 노. 하나만 대답해요. 저 좋아하세요?"

"예... 스."


귀에서 시작된 빨간색이 점점 번져 동석의 얼굴 전체를 물들였다. 그 모습에 입꼬리 한쪽이 올라가려는 걸 기를 쓰고 막았다. 귀여운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점심 한 시간으로 뭘 하겠다고. 밥이나 먹고 말지. 주말에 봐요. 이번 주 토요일 시내에서 1시."

"예?"

"영화를 보든, 카페에서 대화를 하든. 어떤 사람인지 보자고요. 시간 다 됐으니 일어나죠."


할 말은 다 한 것 같아 가볍게 티슈로 입을 한 번 훔치는데 갑자기 너무 억울했다. 나는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확인을 해보고 싶은 사람인데. 내가 먼저 말하게 하는 남자가 어딨어? 답답한 마음이 한 번에 넘쳐버린 건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물색없이 새어나갔다.


"이런 건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잡아야지."


<빨래>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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