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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세탁기_4. 탈수

<빨래> 이적

by 윔지테일

가느다란 가방 끈이 어깨를 짓눌러 뼈가 으스러질 듯하다. 도서관까지 걸어가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눈앞에 보이는 언덕 위 하얀 건물이 히말라야 만년설보다 시리도록 멀다. 경보하냐는 주변의 핀잔이 무슨 소용일까. 대자연 앞에서는 나도 한 마리 거북이일 뿐이다. 약사 말대로 약효가 오를 때까지 조금 쉬었다 갈걸. 급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봤자 보이는 건 골목 끝까지 차오른 음식점 간판들 뿐. 쉬어갈 곳은 버스 정류장 벤치 아니면 카페 몇 개가 전부다. 널리고 널린 카페인데도 이제는 아무 곳이나 들어가기가 조심스럽다. 동석 때문에 잃어버린 내 단골 카페 때문이다.


토요일에 집에 있기 싫어 나오긴 했는데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이나 하자 싶은 마음에 회사에 가다가 그 카페를 발견했다. 회사 근처에서 토요일에 문 여는 가게는 그곳이 유일했다. 사장 언니 말로는 주말 근무자나 건물 청소 직원들을 본인이 독점을 한다나. 안 그래도 회사 출근 기록이 남는 게 영 찜찜하던 차였다. 잘 됐다 싶어 그곳에서 매주 토요일을 보냈다. 화상영어에, 자격증 공부, 블로그도 쓰고, 노래도 들으며 그 시간이나마 동석을 잊었다. 누군가 카페 문을 열며 "어? 형수님!" 하고 부르기 전 까지는.


동석의 옆자리 김대리는 동네 마실 나온 듯 한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헤어만큼은 결혼식 날 봤던 멀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내 목례가 끝내기도 전에 내 앞에 와서는 와이프 가게에서 만날 줄을 몰랐다며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그저 사회적 미소를 그에게 보낸 나는 오늘이 이 카페를 오는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알았다. 결혼식 할 때도 신부대기실까지 와서 동석이 나의 건망증을 걱정한다느니, 일할 때 카리스마가 넘쳐서 그렇게 덤벙거릴 줄 몰랐다느니 할 말 못 할 말 다 늘어놓고 간 인물이었다. 그 입이 오죽할까. 어찌 보면 김대리에게 고마워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신혼여행길에 지갑 두고 온 걸 얘기할 때 동석의 반응을 무의식적으로 예상했을 테니 말이다.




신혼여행 전날까지도 놀 생각에 들뜬 동석과는 달리 나는 또 뭔가를 두고 올까 노심초사하며 가방을 몇 번이나 헤집었는지 모른다. 내 건망증에 제일 스트레스받는 건 나다. 똑같은 물건을 몇 개씩 사놔도 잃어버리고, 두고 오고,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리기 일쑤다. 동석은 물건의 자리를 지정해 주라 했지만 그 자리가 뭐였는지 잊어버리는데 어떡하라는 건지. 그래도 동석의 조언대로 여행가방 짐 리스트를 만들어 썼지만 거기에 지갑을 쓰는 걸 잊어버린 것뿐이었다. 지극히 나다운 상황.


"미안해. 리스트에 지갑 쓰는 걸 깜박했어."


그런데 그 얘기를 하자마자 동석의 목소리에 온 차가 울렸다.


"왜! 오늘까지 그러는데! 내가 잘 좀 챙기라고 몇 번을 말했어! 이걸 언제까지 봐줘야 해?"


공항까지 20분.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동석은 내비게이션을 확인한 뒤 자동차 핸들을 뽑아낼 듯 때리며 흔들었다. 내 잘못이니 최대한 미안함을 섞어 차분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카드 가지고 왔잖아. 그 카드를 써야 할 것 같아서 얘기했어. 미안해.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 같을텐데. 난 자주 이러니까. 이럴 땐 대처방법을 빨리 생각하는 게 더 낫더라고. 진짜 미안해. 비행기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화내지 말고 가자. 응?"

"나도 카드 두고 왔으면? 그래도 그렇게 차분하게 얘기할 거야?"

"그럼 비행기 티켓을 미루면 되지. 돈은 아깝지만 사람이 실수할 수 있잖아."


그러자 동석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여권과 핸드폰을 물어봤다. 그건 당연히 리스트에 있으니 챙겼다고 하자 시뻘겋게 달아오른 동석의 얼굴과 함께 튀어나온 한 마디.


"너는 왜 일할 때랑 사람이 다르냐."


동석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면서 다른 한 손은 급하게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운전이 불안해 보여 손을 뻗으려다 이내 움츠려 들고 말았다. 잠시 후 동석의 목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로 흘러나오는 댄스곡들. 동석은 음악에 맞춰 본인의 허벅지가 터트릴 듯 쳐댔다. 그러고는 마치 영화 속 군인처럼 걸그룹 노래를 무슨 군가 부르듯 따라 불렀다. 그때 처음으로 동석과 한 공간에 있는 공포를 느꼈다. 나중에는 저렇게 날 때리지 않을까?


여행이란 들뜸, 가까운 이와의 인사, 업무의 무료함이라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웅성거리는 공항에서 우리 둘만이 침묵했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탑승 수속을 기다리는 동석의 표정을 견디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줘."


자동차에서의 행동과는 다르게 동석은 여행 내내 다정했다. 식당에서 내 의자를 빼주고, 문을 열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내 이불을 정리해주고,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을 그의 행동이 마냥 반갑지 않았다. 그저 공항에 도착해서 한 말을 들어준 것뿐이었을 테니까.


그 뒤로 눈을 깜박이듯, 숨을 쉬듯, 심장이 박동하듯 가방을 헤집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 몇 번이고 그 물건이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같은 가방 안에 똑같은 물건을 두어 개씩 챙기기 시작했다. 결혼 초기에는 동석이 내가 물건을 잘 챙겼는지 몇 번이고 물어봤다. 심지어 내 가방을 뒤적거리기까지 했다. 사실 립스틱이나 교통카드 같은 걸 몇 번 잃어버리거나 집에 두고 온 적도 있었지만, 그런 얘길 동석에겐 하지 않았다. 동석은 내 가방이 보부상처럼 점점 커져가는 건 느끼지 못한 채, 어느 날부턴가 외출 전 내 가방 속 물건들을 읊어 내리길 그만뒀다. 외려 본인이 필요한 물건을 내 가방에서 찾기 시작했다.


"자기가 이렇게 들고 다니니까 너무 편하다!"


동석이는 그 가방에, 그 말에 어떤 무게가 있는지 알기나 할까.


동석의 질문이 멈춘 이후,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나는 동석과 연애하던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선크림만 대충 바르고 나와도 반짝이던 눈을, 물건을 두고 올까 봐 회사 노트북 가방을 들고 나와도 귀엽다고 내 볼을 잡아당기던 손을, 교통 카드를 두고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말해도 "덕분에 나를 위한 커피를 살 시간이 생겼네!" 하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할 걸 짐작했나 보다. 지금 다시 그렇게 해준다 해도 마음은 돌아서지 않겠지만.




눈은 몸에서 가장 게으른 부위라고 했던가. 어느새 내 발끝은 도서관 정문 앞에 와 있었다. 거친 숨소리와는 다르게 마음은 한결 개운했다. 진통제도 약효가 도는지 허리를 붙잡던 손을 놓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낼 수 있었다. 도서관 옥상 끄트머리에 잡혀있던 햇살은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나의 여정을 축하하는 스포트라이트를 쏘아 주었다. 도서관에서 딱히 뭘 하겠다고 계획을 잡은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집생각을 못하게 해 줄 흥미로운 책 제목을 찾아다닐 생각이었다. 창밖을 보니 저 멀리 먹구름과 파란 하늘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까지 구름이 넘어오려나. 오후에 비 온다고 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비만 오면 시달리는 요통도 오늘은 생리통 때문인지 비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빨래를 해야 할텐데. 동석은 이번에도 세탁기를 돌리고 잊어버렸을까.



<빨래>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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