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이적
조각 빛 하나가 책장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얀 종이에 반사되는 햇살에 눈이 부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빼곡해 보이는 나뭇잎 사이로 말간 빛이 부서질 듯 바람의 장난 따라 깜박거렸다. 바람결이 싣고 오는 숲 내음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산 중턱에 있는 도서관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바로 이 순간일 것이다. 벤치에 앉아서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책을 마주하는 것. 도심 한가운데 있는 도서관에서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부담감에 자격증 공부니, 토익 공부니, 이것저것 들춰봤었다. 내가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어 더 작은 도서관을 찾았다. 여기서만큼은 보고 싶은 책들을 들추며 일의 부담에서 벗어난, 오롯한 나를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잠시 만끽하던 바람이 잦아들어 다시 책으로 시선을 줬다. 우연인지, 아니면 진짜 무언가 있는 걸까. 햇살이 책의 한 문장을 무대 위 핀 조명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하니?'
일하는 나를 표현하자면 '계산기'? 질문이 오면 정확한 답을 도출한다. 그리고 일만 한다. 나라고 다른 사람들처럼 티타임을 갖고 싶지 않겠냐만, 그러면 내 업무 모드가 꺼지고 건망증 모드가 켜진다. 나에게 근무 8시간은 처리할 일만 생각하기에도 여유가 없었다. 밥때도 에너지 충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아침에 싸 온 도시락을 혼자 오물거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점심시간을 음식점에서 수다와 기다림으로 소비하는 것, 괜히 카페에서 돈을 써가며 자릿세 내고 다 같이 셀카를 찍어대는 것. 모두 회사 생활에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결혼하고 싶다고 매일 돌림노래를 부르던 김 주임은 그런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불만이었나 보다. 툭하면 불통하는 직원은 너무 싫다며 앞담화를 하기도 했다. 업무로 딴지를 걸진 못했으니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그런데 그 노처녀가 시집을 간 걸 기점으로 나에게 붙이는 시비가 사라졌다. 심지어 부드럽게 업무 협조를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남편 없는 게 저렇게 사람을 히스테릭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나는 그 기간이 싫다. 사람답게 살려면 시집을 가야겠다, 하고. 그맘때쯤부터 동석이 나에게 밥을 사기 시작했으니 '사랑은 타이밍의 예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다. 나는 다만 살아온 날이 그랬다는 거지, 스스로를 평범의 극치로 여겼다는 건 아니다. 동석이 연애 초기에 가장 먼저 했던 질문도 의문스러움이었으니까.
"핸드폰에 셀카가 하나도 없네?"
퇴근 후에는 오롯이 집에서의 시간을 만끽했다. 정확히는 회사에서 쓴 에너지를 재충전하느라 외출 시간은 집 앞 편의점 10분 뿐이었다. 사진도 뭘 꾸미고 있어야 찍지. 쇼핑이라고 해봤자 퇴근길 마트에서 파는 마감 세일 50% 반찬과 적당히 필요한 옷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게 전부였다. 주말은 잊어버릴 걱정 없이 누워서 핸드폰 보는 것뿐. 핸드폰 사진 앨범에는 업무용 기기, 영수증 사진만 잔뜩 저장되어 있었다.
"밖에 나가서 뭘 잃어버리라고."
"사계절은 느끼고 살아야지. 다 두고 다녀도 되니까 나랑 놀러 다니자."
그날을 기점으로 동석과 새로운 곳에 가는 재미에 빠졌다. 핸드폰으로나 즐기던 벚꽃놀이, 글램핑, 메타세쿼이아 숲길, 뮤지컬 공연, 야구 경기, 놀이공원. 어차피 스크린으로 다 볼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시각각 다른 색, 공기, 향기를 느끼며 경험은 모든 감각을 쓰는 것이라는 걸 동석을 통해 배웠다. 어느새 내 핸드폰 사진 앨범은 시커먼 기계와 하얀 종이 영수증을 밀어내고 알록달록 화사한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회사와 집만 오가던 나의 일상에 다채로움이 채워지는 순간들이었다. 건망증 따위는 작은 일이라며 모든 순간을 온전한 나와 동행하는 동석. 그 사실이 그렇게 편하고 행복할 수 없었다.
그제야 김 주임을 이해했다. 결혼은 결국 자기 편을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나에게도, 동석이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까.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 신혼여행 이후 동석과 외출하는 일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외출은 즐거움이 아니라 가방 검사를 위한 행위였다. 집에만 있는 시간도 편하진 않았다. 온갖 집안일을 동석의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설거지 끝내고 물기 닦을 수 있었잖아."
"난 이 반찬은 안 먹는다니까."
"빨래가 건조대에서 화석이 되겠어. 언제 걷을 거야?"
"잊어버린다고 말하지 말고 청소하고 정리를 해."
급기야 내가 모든 가방에 똑같은 소지품을 채워 넣었을 무렵 동석은 나와 놀러 가는 일에 점점 소원해졌다. 오히려 피곤하다며 주말을 게임으로 보내기에 바빴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나도 이젠 주말에 집에 있는 게 좋아. 자기가 왜 주말에 집에만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주말 내내 게임과의 일체화 작업을 마무리한 동석이 소파에 길게 누워 숨을 쉴 때마다 가죽과 몸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문득 빨래 더미 앞에 앉은 내 등에 대고 저렇게 내뱉은 거다. 순간, 빨래를 개던 나의 손이 멈췄다. 나도 이젠 너를 닮아가 밖에 나가는 게 좋다고 말하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동석도 회사 생활에 시달릴 테니까. 나는 동석에게 안식처로, 동석은 영원한 내 편으로.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곱씹었다. 건조대 모양대로 굳어버린 수건이 흐물거릴 때까지 폈는데도 손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동석의 말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살갗을 부드럽게 훑고 가던 바람이 어느새 습기를 안으며 책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오려나. 벤치 옆에 세워 둔 큰 배낭을 열어 뒤적거려도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언제 꺼냈나, 한참 생각하다 문득 그 카페 언니에게 '저 우산 있어요!' 하고 꺼내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친다.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니 없어져 버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빨래가 말썽일 텐데. 이번에도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잠들었을까. 생각이 그곳까지 미치자 더 이상 도서관에 머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