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이적
까맣고, 동그랗고, 네모진 얼굴. 내 어릴 적 기억 속 엄마는 주름 없었을 말간 모습보다 커다란 카메라가 먼저 떠오른다. 엄마는 항상 내 사진을 찍었다. 내가 카메라를 질색하는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넘어가는 그 시간 동안 엄마의 사진 찍기는 멈출 줄 몰랐다. 지금 와서야 그게 다 순간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안다. 어린 나는 매번 그 비싼 필름 값과 현상비를 쓸 거면 로봇이나 사달라고 졸랐지만 말이다. 엄마는 가끔 늙어버린 나를 보기 싫다고 앨범을 들추면서 꼭 한 마디를 보탰다.
"동석이 어릴 때 진짜 예뻤는데. 크는 게 아까웠어."
"애가 그렇게 이뻐?"
"그럼. 니가 니 애 낳아봐. 어릴 때 내가 이랬을까, 아니면 니 아빠가 저랬을까 하게 된다니까?"
"나 아빠 닮았잖아? 지금은 왜 보기 싫대?"
"봐봐, 사진 속 요 귀염둥이랑 수염 시커멓게 난 너랑. 누가 더 이쁘니?"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누구 앞에서 나이 타령이야. 그 뱃살이나 빼세요. 아빠 닮아서 고혈압 쉽게 온다."
그게 해원이 더 신경 쓰였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해원의 핸드폰 속 사진첩에 그 흔한 본인 사진도, 풍경 사진도 없었다. 법인카드 영수증과 기계 사진으로만 채워진 회색빛이 낯설었다. 하루의 기록이 '나'가 아닌 '일'로만 이루어진 삶의 단조로움을 깨주고 싶었다. 카메라가 어색해 그저 똑바로 서서 짓는 미소 말고, 본인은 절대 볼 수 없는 눈웃음을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아니, 나를 만나기 전의 해원이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그 모습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이게 사진을 찍던 엄마의 마음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탄생부터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매일이 아까워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은 사랑이란 이런 걸까. 대관절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럽길래 엄마는 항상 카메라 뒤에 서 있던 걸까. 해원이보다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내 아이를 꿈꿨다.
나의 바람과 달리 아이를 가지는 일은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아니라 해원이 때문에. 해원의 건망증을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아이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왜 일할 때는 기계처럼 처리하면서 일이 끝나기만 하면 저렇게 다 흘리고 다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신혼여행 지갑 사건을 시작으로 내 아이의 엄마가 될 해원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끝낸 뒤 주변 물기 닦는 걸 잊어버릴 때, 괜히 고생해서 내가 안 먹는 반찬을 만들 때, 빨래 걷는 걸 잊어버릴 때, 물건을 아무 곳에나 둬서 못 찾을 때. 일하는 것처럼 평상시에도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어느 순간, 해원의 모든 것을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검사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게 사랑이라 믿었으니까.
처음엔 해원도 고생이 많았다. 연애 시절에는 내가 해원이를 챙겨줬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일할 때는 건망증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니 본인의 사생활에서도 그런 똑 부러짐을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일 끝나고 나서 쉬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나사 빠질 시간 하나 없을 텐데 미리 연습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몇 년 하자 해원이 집에서도 잊어버리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 걱정이 언어화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냈다. 모든 물건을 널어 놓아야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모든 물건은 늘 제자리에 있었고, 외출할 때마다 확인하는 가방 안에는 항상 챙겨야 할 물건이 빠지지 않았다. 이제는 집에서 마음 놓고 게임을 하고 있어도 해원이 걱정되지 않았다. 뭐라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빨래를 개고,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있었으니까. 해원이 주말에 집에만 있었던 것처럼, 모든 걱정거리가 없는 집에서 늘어지게 쉬는 게 새삼 좋다 싶었다. 그렇게 나도 해원의 건망증이란 걱정 없이 집에 머무는 시간을 점점 늘려갔다.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의 얼굴이 잔뜩 들어 있는 앨범을 연도별로 만들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지만 그날은 선명히 기억한다.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인데.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동석은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아이가 너무 좋아 스포츠 교육을 전공했다던 동석의 바람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두려웠다. 지금도 내 물건을 잘 못 챙기는데 아이는 오죽할까. 아이를 낳으면 기억력의 절반은 아이에게 준다는 농담 같은 말이 나에게는 공포였다. 그래도 동석의 말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동석을 닮은 아이는 어떨까, 하는 기대가 공포를 짓누르는 경험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아이를 준비한다는 건 내가 계획하고 노력한 값을 단 하나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몇 년의 노력은 또다시 몇 년의 실패로 기록되었다. 소식이 늦는 것뿐이다. 건망증 고치라고 하늘이 시간을 주는 거다. 그렇게 여겼다. 하늘이 다른 기회를 준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그날은 동석의 등쌀에 못 이기고 이사한 지 1년이 지나서야 집들이를 했다. 은행 빚 80퍼센트에 화장실만 겨우 지급한 집인데도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동석은 회사 사람들과 술잔을 채우고 비우느라 뒤편에서 끊임없이 안주를 내놓는 나를 아예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총각 때 치기 어린 술자리 일화를 재연이라도 하듯 온 집안은 동석의 조절되지 않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때 최 부장이 동석에게 한 마디 내뱉는 거다.
"이제 아이만 있으면 되겠네. 언제 소식 들려줄 거야?"
으레 시부모님에게 얘기하듯, 나에게 아무 말 말라고 으름장을 놓을 줄 알았는데.
"우리 와이프! 진짜 일할 때는 멋있는데 건망증이 엄청 심했어요. 맨날 물건 두고 다니고."
설거지를 하던 손이 순간 움찔했다. 자연스럽게 뒤돌아 동석을 바라봤다. 입꼬리를 올렸지만, 작은 경련이 일었다. 말도 안 된다는 사람들의 웃음과 볼멘소리에 동석의 손이 허공에서 휘적거린다.
"진짜라니까요. 지갑이고 핸드폰이고 잘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근데! 요즘은 잘 챙기더라고요?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건망증 때문에 집에서 아이 케어 못할까 봐 걱정 많이 했거든요."
"외벌이하려고?"
"와이프 집에 있는 거 좋아해요. 내가 처음에 그거 알고 얼마나 안심했는데요. 애는 엄마가 키워야죠."
동석의 말이 끝나자 젊은 직원 몇몇이 나를 흘깃 쳐다봤다. 붉어진 눈두덩이가 티가 났을까. 급히 손을 뻗어 아까 껍질만 까 둔 양파를 채썰기 시작했다. 양파가 매운지, 내 마음이 아린지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