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이적
"빨래를 집안에서 말리면 안 좋다는 말씀이시죠?"
"네. 빨래가 마르면서 날아간 수분은 집안의 습도를 높이고 곰팡이균을 키울 수 있어요. 세제를 너무 많이 넣었을 경우에는 세제도 집안에서 떠도는 거죠. 그게 피부염과 호흡기 질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집 밖이나 베란다에 널어놓으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세제는 적정량만 사용하세요. 많이 쓴다고 잘 빨아지는 건 아니거든요. 빨래를 햇볕에 말리면 살균 효과도 있어요."
"웃기고 있네."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사이로 낭랑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빨래를 널다가 헛웃음이 났다. 거실 한가운데 가문 날 나무처럼 축 쳐진 빨래들이 건조대 위에 수북하다. 청소기 돌릴 타이밍이 궁금해 찾아본 동영상인데 엉뚱한 소리만 해댄다. 누가 비 오는데 미쳤다고 베란다에 빨래를 널어. 사흘 뒤 눅눅하고 쿰쿰함 옷 냄새를 누구 탓하려고 저러는지. 양말을 널던 손을 멈추고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핸드폰을 빼내 동영상을 꺼 소파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아!"
던지는 순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흠집 하나 없는 최신폰이 소파 한구석에 푹 하며 떨어졌다. 한 달도 안 된 신상을 이렇게 던져버리다니. 256기가 바이트 핸드폰을 예약으로 산 덕분에 몇 만 원 할인받았어도 무려 백 이십만 원이 넘었다. 애지중지하던 게 얼마나 됐다고.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핸드폰도 바꾼 마당에 건조기나 살까. 전에 해원이 건조기 사면 안 되냐고 몇 번 물었던 적이 있었다. 너무 비싸고 좁은 집에 둘 곳도 없다고, 전기세 많이 나간다고 핀잔을 줬던 과거의 내 입을 용접해 버리고 싶다. 빨래 너는 게 생각보다 중노동이었다. 허리를 몇 번을 굽히는지, 빨래를 얼마나 털어대는지 모르겠다. 게임으로 단련된 기립근과 전완근은 이미 'GG'를 쳤다. 그거 돈 몇 푼이 뭐라고.
사실 해원에게 뭘 사준다고 해서 재미를 느낀 적은 없었다. 단종이 된 핸드폰을 쓰고 있어서 바꿔주려 해도 해원은 거의 울다시피 하며 싫어했다. 스마트 워치와 태블릿 또한 며칠 흥미를 느꼈을 뿐 서랍에 고이 모셔지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큰맘 먹고 선물해 준 명품백은 인터넷에서 또래 여자들이 환장한다고 했는데. 내 월급을 거의 갈아 넣은 가방은 지금도 아무 곳에나 걸려 있다. 매번 반품하라는 잔소리는 덤. 물건 욕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줄 알았던 해원이 사고 싶다고 말한 두 개가 하필이면 음식물 처리기와 건조기였다. 왜 저런 게 갖고 싶은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쉽게 해내던 집안일 하나하나가 힘들어서 그랬다는 걸 해원이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해원은 지금도 김대리 와이프 카페에 있겠지? 이 빗속에 돌아다니지는 않을 테고. 김대리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하다 그만둔다. 아내 위치를 딴 놈한테 묻는 남편으로 낙인찍히기는 죽어도 싫다. 해원이 내 전화를 받을 리가 없는데. 무슨 핑계로 전화를 할까. 아니 문자를 보낼까? 빨래를 널다 보니 건조기가 필요한 것 같다고, 모델 골라달라 해볼까? 지금이라도 사준다면 내가 매번 핸드폰을 바꾸는 마음을 이해하려나? 언제나 오늘보다 내일 좋은 물건이 나올 테니까. 요새 건조기 얼마지? 음식물 처리기는 어디 물건이 좋지? 건조기 산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풀릴까?
소파에 집어던진 핸드폰을 집어내려다 이내 빨랫감으로 돌아간다. 서프라이즈로 사겠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일단 빨래를 다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다시 방에 들어가서 게임 승급 전을 해야 한다. 엠카운트다운에 신인 걸그룹, 그룹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첫 무대 직캠 영상 떴던데, 그것도 옆에 띄어놓고 봐야지. 승급 전 끝나고 건조기 검색하면 되겠다. 아까 핸드폰만 안 했어도 지금쯤 다 봤을 텐데. 마음이 급하다. 빨래 바구니 안에는 짝을 찾겠다고 스테이지 위에 뒤엉킨, 클러버 같은 양말만 잔뜩 남아 있다. 에라 모르겠다. 양말을 그냥 바닥에 흩뿌려 놓고서는 청소기를 찾았다. 아차, 청소도 안 했는데 양말을 바닥에 널어버렸다. 뭐,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속옷도 아니고. 어차피 빨랫감 중에서 제일 더러운 것 아닌가.
생각해 보니 청소기를 돌리면서 걸그룹 영상을 봐야겠다. 볼륨도 빵빵하게 키워서 보면 게임하면서 보는 것보다 훨씬 집중하기 좋을 거다. 지루하지도 않을 거고. 좁디좁은 집의 벽 한편에 서 있는 무선 청소기를 충전기에서 빼내고는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티브이를 켜서 유튜브 검색을 한다. '엠카'라고 치자마자 검색했던 단어로 '엠카운트다운 직캠'이 뜬다. 바로 선택해서 검색하니 보고 싶던 신인 걸그룹 영상이 첫 번째로 올라온다. 내 시간을 아껴주는 알고리즘 만세다. 동영상을 클릭하고 청소기를 작동시키자 청소기 소리와 티브이 소리가 뒤엉키며 소리 전쟁이 시작됐다. 청소기 소리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매번 잊어버린다. 이럴 땐 압도적으로 이겨버림 그만이다. 티브이 볼륨을 올린다. 10, 11, 한 칸씩 올리다 보니 어느새 음량은 최대치. 볼륨 조절이 가능한 티브이를 청소기가 이길쏘냐. 맑은 걸그룹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신나게 청소 좀 하겠구먼!
도서관에서 읽던 책을 빌려서 한 골목 내려오자마자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폭포수 같다. 거센 장대비에 우산도 없이 돌아오며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는 말이 뭔지 확실히 느꼈다. 빌린 책은 젖지 않게 하겠다고 가방을 꼭 껴안고 걸었더니 생긴 어깨결림은 덤이었다.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에 들어서자 보이는 편의점이 하얀빛과 현란함으로 유혹한다. '우산 판매'. 아르바이트생 누군지는 모르지만 센스 있네,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다. 이미 다른 가방에 쑤셔 넣은 우산이 몇 갠대. 게다가 웅크린 몸을 펴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빗물이 가방에, 책에 스며들 거란 생각이 스쳐서다. 그건 안 되지. 걷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가까운 거리라도 택시 타기 아까워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항상 다짐뿐이라는 걸 안다. 택시 기본요금 거리에 비 안 맞고 갈래, 아니면 그 값으로 라면 사 먹을래, 물어보면 항상 라면이 이겼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도서관에서 라면 먹을 걸. 왜 도서관 지하식당에서 끓여주는 라면은 분식점보다 맛있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을까. 따뜻한 걸 먹지 않으면 딱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국물을 떠올리며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 그 순간 멀리서부터 아련히 들리던 걸그룹 음악이 아파트 단지 안을 잔잔하게 울렸다. 비구름을 이기지 못한 노랫말이 낮게 떨어지는 비와 함께 웅덩이처럼 고이고 있었다. 아파트 동 입구 지붕 아래에 들어서서야 굽어진 허리와 어깨를 폈다. 나는 속옷이 비칠 게 걱정이 될 정도로 홀딱 젖었어도 가방은 끈만 젖어있을 뿐 물방울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데, 단지에 퍼져있던 음악의 온상지가 우리 동 사람이었나 보다. 건물이 공명관처럼 낭랑한 여자 아이돌의 노랫말을 퍼뜨리고 있었다. 어느 질풍노도 청소년이 걸그룹에 심취했나. 우리 단지에 교복 입은 남자 중고등학생이 몇 명 있던데. 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생각보다 금방 찾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수록 노랫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8층입니다.'라는 음성과 함께 문이 열리자 귀가 터질 것 같은 음악이 우리 집에서 새다 못해 찢어 나오고 있었다. 건넛집이라고 의심도 들지 않았다. 자식들 다 출가 시킨 70대 부부가 볼륨을 최대로 키워놓고 들을 노래는 아니었으니까.
속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꿈틀거림을 짓누르고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항상 누르던 박자인데도 익숙한 버튼음은 어디 가고 되지도 않는 아이돌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리 중문 너머로 동석이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다리와 눈이 티브이에 묶여 있으니 한 손에 쥐어진 청소기는 반복운동만 도와주는 꼴이었다. 저 부분만 반짝거리겠네. 이윽고 한편에 펼쳐진 건조대 위 빨래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현관 앞에서 느낀 감정이 본색을 드러낸 거다. 분노. 건망증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빨래 널기 전 청소. 그게 그렇게 어렵나? 하지 말라는 빨래를 하고 필요 없다는 청소를 계속하기에 청소 먼저 하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아니다. 이제는 그런 열정도 없다. 말하면 뭐 하나. 결국 본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나를 끌고 가고 싶을 뿐일 텐데. 나는 예전에 핸드폰에 받아놓은 리모컨 어플을 실행시켜 티브이를 꺼버렸다. 사방을 울리던 유행가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청소기 소음이 작게나마 거실을 채우는 지금, 오히려 적막하다.
깜짝 놀란 동석은 청소기 끄는 것도 잊어버린 채 한쪽에 세워놓더니 티브이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빗물과 함께 신발에 늘러 붙어버린 발을 억지로 떼어낸 참이었다. 양말을 벗어 한쪽에 던져버리는데 찰팍 하는 소리와 함께 빗물이 사방으로 튄다. 머리카락에서도 빗물이 조금씩, 하지만 일정하게 떨어진다. 옆에 세워놓은 가방에 묻을까 싶어 가방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어 머리카락을 한 손에 꽉 움켜쥐었다. 몇 가닥의 물줄기가 현관 바닥에 자그마한 화가용 팔레트를 그리듯 퍼져나간다. 그 위에 소매와 바지가 머금은 빗물도 조금씩 짜내 크기를 키웠다. 갑자기 청소기 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들고 집안을 바라봤다. 동석은 이제야 중문 너머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온몸에서 물을 짜내는 나를 향해 놀란 얼굴로 걸어오는 동석. 나는 간이 탈수를 멈추고 중문을 열어젖혔다.
"일찍 왔네. 근데 왜 이렇게 흠뻑 젖었어? 우산 안 가지고 갔어?"
"남이사 우산이 있든가 말든가."
"항상 우산 들고 다녔잖아. 깜박했어? 잃어버렸어?"
"내가 말했잖아. 빨래 널기 전에 청소하라고."
"아니 그게, "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아니면 아예 손을 대지 말던가."
갑자기 동석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빨래 한 뒤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터넷으로 찾아봤다고!"
"말로 해봤다 하는 건 누가 못해. 대답은 몸으로 하는 거야."
"그럼 알려 주던가!"
또 안 알려 준 내가 문제구나. 지겹다. 갑자기 누가 내 창자를 쥐어짜는 것 같다. 진통제 효과가 벌써 끝난 것 같았다. 그제야 혹시 옷에 피가 묻지는 않았을까 걱정된다. 내 마음보다 마른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파트 입주민 그룹톡에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다.
'음악 듣는 거 누군가요. 소리 좀 줄여주세요.'
'주말인데 너무하시네요.'
'비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여러 불만의 목소리와 함께 동대표의 메시지가 마지막에 길게 자리를 차지했다.
'입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아파트는 우리 모두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서로의 쉼을 존중하기 위해 음악 감상 등을 할 경우 음량 조절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쾌적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특히 자녀 분들에게도 이 점 공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급하게 동영상 하나를 찾아서 재생해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오래된 핸드폰이라 그런지 아무리 소리를 키워도 청소기 소음보다 못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듣고 싶으면 듣고 아니면 말겠지.
해원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고 핸드폰으로 몇 번 뚝딱거리다가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해원의 핸드폰에서는 내가 아까 봤던 동영상 속 자칭 빨래 전문가의 목소리가 작게 퍼졌다. 나도 저거 봤다고. 이따가 분명히 따져야겠다. 내가 언제까지 저 목소리에 기가 죽을 줄 알고? 우선 저놈의 핸드폰부터 바꾸라고 해야지. 건조기보다 저 핸드폰이 먼저다. 언제까지 저런 구식 핸드폰을 고집부리려는지 모르겠다.
"저 핸드폰 바꾸겠다는 소리는 도대체 언제 할까."
해원이 본인도 모르게 그린 물방울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마 동영상 소리 덕에 해원이 듣지는 못했을 거다. 다용도실에 있는 마른걸레를 하나 꺼내 해원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해원의 핸드폰은 여전히 시끄럽다.
".... 빨래를 햇볕에 말리면 살균 효과도 있어요."
"그래도 비가 올 때는 집안에서 널 수밖에 없잖아요. 이럴 땐 어떡하죠?"
"비가 온 다음에 환기를 잘 시켜주셔야 해요. 제습기나 공기청정기를 사용하시는 것도 방법이고요."
"아하. 그렇군요."
"빨래를 널기 전에 청소를 먼저 하시는 게 좋습니다. 빨래에 묻는 먼지도 줄이고, 습도가 올라갈 때 공기 중 먼지와 진드기가 떠다니는 양을 줄일 수 있죠."
"만약 빨래를 널고 나서 청소를 하고 싶다면요?"
"청소기 대신 걸레질을 해주시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마른걸레도 괜찮아요."
쪼그려 앉아 빗물을 훔치느라 흔들거리던 몸의 반동이 멈췄다. 들고 있던 걸레를 뒤집어 보니 빗물이 걸레의 중간중간을 적셨고, 나머지 공간에는 회색빛 먼지가 보푸라기 일어난 니트처럼 뭉쳐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해원이 닫아버린 방문을 바라봤다. 하얀 방문이 끝도 없이 높아만 보인다. 저 문을 내가 열어야 할까, 아니면 해원이 열어야 할까. 방문 너머로 작은 인기척이 들린다.
"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