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향성은 그렇게 내향성이 되었다.

나와의 대화

by 엄민정 새벽소리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들은 연말연시와 만나 요란한 날이 된다. 성탄 트리에 점등하고 크고 작은 눈꽃스티커가 쇼윈도에 붙었다. 차려입고 나온 여인들의 다리에 살이 비치는 스타킹 한 장이 바디로션처럼 얇게 감쌌다. 입었다고 볼 수도, 입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 세차게 추운 날에 그런 차림으로 그렇고 저런 모임자리에 나가는 젊은이들이 번화가를 빽빽하게 메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사람들은 연중행사처럼 자신의 소속을 다시 한번 확인하곤 했다. 인맥 관계의 동그라미 안에서 이들은 안정을 찾고 내년의 평안을 보장받는 듯했다. 나의 젊은 날도 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자리를 마치고 돌아온 자리에 귓속의 묘한 이명만이 남았다. 텅 빈 냉장고와 설거지가 쌓인 주방을 깨끗이 치우고 채워 넣을 생각은 없다. 다시 찾아온 적막은 자주 배고픔을 동반했다. 실제 배고픔인지 가짜 배고픔인지 알 길이 없어 휴대폰만 다시 만지작 거렸다.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빈 공간을 사람들 속에서 찾으려 했을 때, 해결되지 않은 경험만이 쌓여갔다. 역설이었다. 나만 모른 채 내가 갇혀 있던 것은 관계 중독이었고, 우울을 동반한 외로움이었다. 오만한 태도와 편협하게 구성된 생각은 감히 표출되지 못한 채 사람들 속에서 좋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따금 통제 불가로 튀어나온 한마디는 그날 밤 불면을 당연하게 불러오기도 했다. 언어가 적절했는지를 묻는 내면 자아가 답을 찾지 못할 때 나는 종종 이불을 둘러쓰고 소리를 질렀다. 나아질 것은 없었다. 어설픈 자존감에서 나온 말은 남은 자존감에 생채기를 내고 밤새 소금을 뿌려댔다.


나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공간은 남도 채워줄 수 없었다. 나만이 가능한 이야기를 남이 대신해 줄 순 없다. 내면 자아와의 대화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날이었다. 허리 근육을 강화하면 디스크 예방에 도움이 되듯, 마음이 아프지 않으려면 마음 근육 운동을 해야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봐야 했고, 틈날 때마다 물어야 했다. 그러나 내면 대화의 꼬리는 자주 잡념의 샛길로 빠지곤 했다. 휴대폰에 '마음 챙김 벨'을 설치하고 15분마다 울리는 종소리에 잡념의 자아를 자각했다. 10분을 넘게 이어지는 생각은 대부분 좋은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시 자각하고 벗어나는 훈련이 필요했다. 나 하나 잘 돌보고 사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평생을 걸쳐 공을 들여햐 하는 일이기도 하다. 틈새로 도망치는 생각을 붙들어 놓기도, 보내주기도 해야 했다. 높아지는 가슴속 엔트로피를 다시 정돈된 상태로 돌려놓는 일에 산책의 도움은 막강했다. 몸이 편할 때 생각은 산으로 가고 미궁으로 빠진다. 필요하지 않은 것과 소중한 것을 구분하는 일은 다리가 빠르게 움직이느라 뇌가 혈액공급에 집중할 때에 비로소 심플해진다.


그곳에 그 벤치가 있어서 나는 그곳이 좋다. 북적이는 시장통을 지나고 중앙선조차 없이 쌍방향을 오가는 차들 사이로 걷는 나는 몸을 모로 돌렸다. 얕은 언덕을 지나 빨간 우레탄 보행자길에 이르면 그제야 내가 있을 길에 당도한다. 줄줄이 이어선 벤치에는 틱톡에 빠진 중년의 아저씨와 아이를 돌보는 외할머니가 햇볕을 아이 얼굴 쪽을 쬐어주고 있다. 지구 북반구의 겨울엔 태양이 귀하다. 이 귀한걸 아기 얼굴에 올려주는 할머니의 마음이 더 귀하다. 이들을 지나고 나면 보이는 빈 벤치를 몇 개 건너뛰어 어느 한자리를 눈으로 찜하고 다가간다. 벤치의 디자인은 심플하다. 네 개의 다리 위에 엉덩이를 붙이는 곳과 등을 대는 곳. 안장과 등받이 사이의 넓은 틈에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이 있다.



길을 가운데 두고 벤치가 길가에 마주 보며 놓여있다. 내가 앉은 쪽에선 맞은 편의 네가 보이고, 네가 앉은 곳에선 당연히 내가 보인다. 몸을 획 돌려 안장과 등받이 사이에 두 다리를 넣고 앉는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도 등받이가 배받이가 되어 받쳐주니 허리가 구부정해지지 않는다. 책 한 권이 있다면 등받이 머리에 올려 읽으면 독서대가 따로 없다. 이렇게 앉은 벤치에서 나는 너를 볼 수 없고, 너도 나를 볼 수 없다. 개방된 공간에 나와 내적 자아만이 남겨진다. 방 안의 그것이 은둔이고 봉쇄라면 이곳의 그것은 자유이고 사유이다. 밖을 보고 앉는 것은 세상과의 대화이지만, 뒤를 보며 앉는 것은 나와의 대화이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은 자연스레 안으로 굽어 들었다. 시야에 자연을 품으면 나쁜 것들은 자연적으로 좋은 것으로 희석되기 마련이다. 자연을 보며 나쁜 것을 생각할 방도는 도무지 없다. 그렇게 좋은 것이 힘을 얻으면, 수많은 자기 검열과 남의 시선을 떠나 꼬깃꼬깃 구겨진 자아가 조심스레 펼쳐진다.


'누가 ~라고 하면 어쩌지?'

모든 결정에 따라붙는 질문에 대답까지 준비해 두는 삶이 측은하다. 내 의견 하나 자신 있게 피력하지 못한 시간은 이불킥을 이불속 자전거 타기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발설하지 못한 의견이 입안을 맴돌다 삼켜지기를 반복한다. '너는 왜 말 안 해?'라는 예상 질문에 '소통의 중심은 경청이야'라는 대답을 마련해 둔다. 경청이 물론 중요하지만 경청만이 답은 아님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텅 빈 냉장고를 열고 한숨을 쉬며 라면 봉지를 뜯을 때 어떤 이는 냉장고가 꽉 차고 넘쳐도 가스레인지에 라면 물을 올린다. 두 라면의 영양가를 생각해 본다. 라면만 덜렁 끓여내 붉거나 흴 뿐인 비주얼과 온갖 채소와 고명으로 색색으로 장식한 라면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 다른 자식이다. 잘 채워야 잘 만들어내기도 한다. 먹어야 배설할 수 있고, 읽어야 쓸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마음을 채워야 깊이 있는 말도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채워진 것에 만족하지만, 누군가는 부족한 것을 계속 찾고 채우려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일은 참으로 쉽지가 않다.


벤치에 그렇게 앉아 있는 일은 이불킥보다 효과가 있었다. 이불킥이 후회의 소용돌이에 한없이 나를 침잠시켰다면, 등 돌려 앉은 벤치는 다음 단계인 반성과 깨달음에 이르게 했다. 남의 못난 발언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인정하지 못할 것은 없어진다. 용서도 일어난다. 여럿이도 어쩌지 못하는 일은 이렇게 종종 혼자의 힘으로 최선의 결론에 다다르기도 한다.

혼자 설 줄 아는 사람은 같이도 잘 설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혼자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곳에서 돌아간 곳은 미궁 같은 공허였다. 자신을 찾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향하고 있었다.


외로움과 심심함은 고급스러움라는 어느 유명인의 말이 떠오른다. 쉴 틈 없이 바쁜이들에게 더욱 그렇다. 이따금 찾아오는 사치 같은 시간을 몸부림치며 보내지 않으려 한다. 스스로를 불완전한 상태라 정의하면 삶은 자연히 남은 반쪽에게 기대게 된다. 이제 완전한 상태라고 정의해 보기로 한다. 완전한 상태는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 늙은 부모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식에 부담이 되며 늙어가는 것이다. 노화된 육체로 인해 자식의 도움에 기대는 것은 순리지만,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여기에도 맥을 같이한다. 자기 자신을 부담으로 여기는 삶은 처절하기 때문이다. 둥글게 가득 찬 보름달을 보며 내 안의 찌그러진 원의 모서리 끝을 잡아당긴다. 잠시동안 구김살 없이 완벽해진 동그라미를 보며 모서리 없이 완전해진 나를 만나는 일은 까마득한 일이면서도 이미 순간순간 이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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