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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stlecake Apr 26. 2019

좋은 사람인 척하는 카페에서

하노이와 로테르담, 그 쯤 어딘가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무심코 빈 잔을 내려다봤다. 커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남은 안쪽 벽과 마지막 한 모금까지 알뜰하게 마셔버린 잔의 바닥. 갑자기 작년 봄,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어느 카페에서 줄리안이 봐준 커피점이 생각난다.





HEILIGE BOONTJES

: pretend to be nice people (좋은 사람인 척하다)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의미를 가진 이름의 카페였다.

이 곳의 특이한 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시켜, 출소 후 사회에 적응하고 일할 수 있게 만든 카페라는 것.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카페 이름이 더욱 묘하게 와 닿는다.










  나를 여기로 데려온 줄리안은 베트남 하노이의 숙소에서 만났다. 숙소에서 마주쳤을 땐 데면데면했지만, 친구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함께 카페에 가서 각자의 시간을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그런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보내면서였다. 인테리어가 멋진 갤러리 카페에서 같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줄리안은 다이어리를 쓰고, 나는 모자를 떴다. 그렇게 한두 시간쯤 충분히 각자의 일을 하다, 그제야 서로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같이 여행을 하고 친해지면서 금발의 푸른 눈 줄리안을 가끔 프린세스라고 놀렸다.



  190cm가 조금 넘는 키, 눈부신 금발에 파란 눈. 같은 숙소에 묵으면서도 (그 게스트하우스는 도미토리 2개와  작은 공용 거실 하나뿐인 아주 조그만 숙소였다) 데면데면했던 건, 동양인인 나에게는 너무 이질적인 그의 외모도 한몫했다. 내 좁은 편견 사전에 의하면, 금발에 파란 눈, 우월한 기럭지와 체력과 영어 실력의 백인 여행자들은 그들끼리 어울리는 습성이 있었다. 그 핑계로 나는 그런 부류로 보이는 여행자들을 만나면 슬그머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카페에서의 대화 이후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것도 제법 죽이 잘 맞는 여행 친구. 하노이를 떠나 라오까이 지역을 일주일 남짓 함께 여행했다.





 약간의 모험과, 랜덤 계획이 함께하는 어메이징 한 여정을 보내고, 헤어지기 아쉬웠지만 나는 라오스로, 줄리안은 베트남 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줄리안이 사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가서 그를 다시 만났다.



HEILIGE BOONTJES


줄리안은 이 의미 있는 카페에 나를 데려갔다. 커피를 마시며 한참 수다를 떨고 그림도 그리다, 줄리안이 갑자기 커피점을 봐주겠다며 내가 마신 커피잔을 집어 들고 천천히 안을 들여다봤다.




Baby
Africa
Mountains
River
Snake
Rice field


 내 커피잔에서 이런 것들이 보인다며 단어들을 맥락 없이 나열했다.

 너 진짜 커피점 볼 줄 아는 거 맞아?

 하지만 나는 커피점이란 걸 처음 들어봤기에, 제법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아침에 마신 빈 커피잔을 다시 들여다본다.

지금 줄리안이 이 컵을 본다면,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나에게서 뭘 보았을까.

당장 그를 만나서 내 얘기를 하고 그 얘기를 듣고 싶다. 줄리안과의 대화가 그립다.


 

다시 그 날의 단어들을 꺼내본다.



나는 나의 베이비(남친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와 아프리카에 가서 산과 강과 논을 뱀처럼 구불구불 누비고 다닐 것이다. 혹은, 아프리카에서 산과 강과 논을 건너는 어드벤처를 하다 뱀을 만날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역시 여행이다.



그리고 그 길 어딘가에서 다시 줄리안을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I miss you, Julian. and I miss our talk thos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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