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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May 11. 2020

나이 들어감과 클래식함, 그 사이 어딘가

세월을 빗겨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

영화 <007 스카이폴> 속 이 그림


영화 <007 스카이폴> 속 한 장면

  영화 <007 스카이폴>의 한 장면. 여기 한 남자가 앉아있다. 그림을 보고 있는 걸까. 그는 한땐 전설적인 첩보요원이었으나 지금은 구시대의 퇴물로 전락해버린 007, 제임스 본드다. 오랜 잠적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그는 요원 테스트도 통과하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현장에 투입되고, 과거 자신이 활동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새로운 환경에 낯설어한다. 그러던 중 그를 도울 미지의 또 다른 요원 Q와 접선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접선 장소인 내셔널 갤러리에서 Q를 기다리며 그림을 바라보고 있던 제임스 본드. 그의 앞에 문득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Q이며 과학 기술자라고 소개한다. 보아하니 딱 봐도 아직 갓 대학생 티를 못 벗은 조무래기 같은데 이런 너드(nerd: 컴퓨터만 아는 괴짜)한 녀석이 요원이라니.. 본드는 영 못마땅하다. 건네주는 무기들도 탐탁지가 않다. 신식 기술이 적용된 최첨단 장비들이라는데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이게 뭔지. 그렇게 본드 Q한동안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데, 그 대화와 그림의 의미가 절묘하다.


요원 Q와  제임스 본드

Q: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묘해져요. 한때 잘 나가던 전함의  퇴역이라니..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나 봐요, 그렇죠? 당신에겐 뭐가 보이죠?
본드: 빌어먹을 큰 배. (일어서며) 실례하겠네.
Q: 007, 제가 새로운 Q에요.
본드: 지금 농담하는 거지?
Q: 왜요? 제가 흰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아서요?
본드: 아직 애송이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Q:  나이는 더 이상 효용성의 증명이 되지 못해요.
본드: 그리고 젊음은 더 이상 혁신의 증명이 아니고 말이야.
Q:  전 잠옷 차림에 노트북 하나로  당신이 현장에서 뛰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내죠.
본드: 그럼 내가 왜 필요한 거지?
Q: 때론 총알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본드: ..요즘 애들은 다 저런가?

-영화 <007 스카이폴>


  '연륜 vs 젊음'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를 견제하는 007과 Q를 카메라는 번갈아 비춘다. 그러고 보니 새삼 제임스 본드의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수염, 주름살이 눈에 들어온다. 반면 얄미우리만큼 총기 가득한 Q는 한껏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언제까지나 재능 있고 혈기왕성한 요원일 것만 같던 우리의 007이 은근히 돌려까여지며(?) 신기술 무기 하나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는 모양새를 보니 괜스레 서글퍼진다. 그런 그들 사이로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그림 하나.


  그런데 이 그림, 묘-하게 007 그와 닮았다.



옛 영웅 테메레르 호의 마지막을 그려낸 영국의 거장, 윌리엄 터너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1839

  먼저 그림을 한번 보자.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큰 배 한 척? 아니 두 척인가? 증기를 내뿜으며 앞장서는 날렵한 배 뒤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클래식한 배 하나가 더 보인다. 바다에서 뭍으로 돌아오고 있는 듯하다. 때는 해질녘. 바다가 석양을 삼키고 곧 어둠이 찾아올 것만 같다. 치이익- 증기를 내뿜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해가 지는 해안가에 서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 풍경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유 없이 고요해지고 생각에 잠기게 되는 기분이랄까.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라는 제목을 가진 이 그림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가 19세기 초 트라팔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던 전함 '테메레르 호'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작품이다. 1805년, 트라팔가에서는 영국 대 프랑스-스페인 연합의 큰 해전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어마 무시한 규모의 연합 함대의 공격에도 영국은 큰 피해 없이 대승을 하게 되는데, 그때 큰 공을 세운 전함이 바로 이 테메레르 호였다. 그러고 다시 보니 그림의 배에서 옛 영웅의 위용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 중 부분 확대  (좌) 테메레르 호와 증기선  /  (우) 해질녘의 해무리    

  하지만 이 전쟁영웅 테메레르 호도 세월의 흔적을 빗겨갈 순 없었다. 영국 산업화 과정에서 증기선이라는 획기적인 배가 등장하였고 그에 따라 영국 해군의 자부심이었던 테메레르 호는 퇴물로 전락하여버리고 만다. 산업화된 효율성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구식 전함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한때는 찬란한 역사를 자랑했던 테메레르 호를 해체하기 위해 신식 증기선이 템즈 강변으로 인양하고 있는 장면을 그려낸 것이다. 신/구의 세대교체의 결정적인 한 장면이라고나 할까. 터너는 여기에 지고 있는 태양을 그려 넣어 저물어가는 옛 영광 표현하는 한편 작품의 비장한 분위기를 극대화시킨다.


  사실 이 윌리엄 터너라는 화가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의 고향 영국에서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로 저명한 국민화가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른 나이부터 착실하게 그림 공부를 하며 실력과 재능을 일궈나갔고, 작품 세계가 확장되면서 꾸준히 인지도를 쌓아온 것을 알 수 있다. 초창기의 터너는 주로 수채화를 그리며 자연주의적 작품들을 많이 그려냈다. 어릴 적부터 무수히 드로잉 연습을 하며 갈고닦은 탄탄한 기본기로 평화롭고 전원적인 영국의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그의 그림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고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았다.


클로드 로랭, 시바 여왕의 승선, 1648  / 윌리엄 터너, 노스 웨일즈 주의 콘웨이 성, 1798

  그러다 20대 이후로는 유채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이내 빛과 색채에 대한 연구에 눈을 뜬다. 특히 클로드 로랭의 <시바 여왕의 승선>이라는 작품을 보고 큰 영감을 받게 되는데,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빛'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자주 드러난다. 즉 자신의 눈에 들어온 풍경 속 빛과 공기의 흐름을 어떻게 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작품을 감상적이고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낭만주의 화풍에 빠져들게 되고 이후로 갈수록 추상적인 느낌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말년에는 영국 로열 아카데미 원장직을 맡을 정도로 명망 높은 화가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이후 인상주의 작가들, 대표적으로 모네와 같은 화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 미술사에 그가 남긴 족적을 인정받아 현대에 이르러서는 영국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눈폭풍,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 1812
비, 증기, 그리고 속도, 1844



나이 들어감에 대하여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한때는 화려한 과거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구식 퇴물 요원으로 무시당하는 007 제임스 본드. 그와 대조되는 캐릭터인, 최신 과학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시대의 천재 요원 Q. 마치 그림 속의 테메레르 호와 증기선과 비슷해 보여서 괜스레 빗대어 보게 되는 건 나만의 설레발일까. 어쩌면 영화의 감독은 Q와 같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만 하는가 하는 올드스쿨의 고뇌를 터너의 그림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지 슬쩍이 짐작해본다.



  영화 속 Q의 대사처럼 누구나 세월을 빗겨갈 수는 없다. 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나. '나도 이제 나이 들었나?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인가?' 그런 이들에게 터너는 그림으로 묵묵히 위로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터너가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를 그린 때는 60이 넘어선 노년의 시절이었다. 작품 속 테메레르 호처럼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신진 화가들, 후배들을 보며 남몰래 질투를 느끼거나 스스로가 한물 간 작가처럼 여겨서 착잡한 심정이 들 때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순간에조차 터너는 잠잠히 붓을 들었다. 그리고 테메레르 호의 마지막 순간을 화려하지 않게, 하지만 초라하지도 않게 그려냈다. 그의 그림은 저물어 가는 어떤 마음들을 말없이 예우해주고 있는 듯하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나이듦'은 어쩌면 구식이나 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클래식함'이 아닐까. 연륜에서 느껴지는 우아함, 여유로움.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 슬퍼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 고전적인 낭만이 있다' 하고 느끼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두고 터너는 "돈을 주거나 혹은 부탁을 한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이 그림을 다시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큰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 마음을 왠지 알 것만 같아서 한번 더 그림을 바라보게 된다. 문득 세월의 흔적이 느껴질 때, 시간의 흐름 속 ''라는 존재의 의미를 사색하고 싶을 때. 그때마다 나는 테메레르 호의 마지막 순간이 담긴 이 그림을 찾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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