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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Jun 07. 2020

우리 각자의 '벨 에포크'

잊지 마, 가장 찬란하고 눈부신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도 있었나요?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났던, 돌아가고 싶은 그 순간은 언제인가요?"


  영화 <카페 벨 에포크>는 바로 이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된다. 원제는 <La Belle Epoque>, 번역하자면 '아름다운 시절, 황금기' 정도가 되겠다. 어느새 흘러가버린 세월, 빠르게 변해버린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주인공 빅토르는 100% 고객 맞춤형 핸드메이드 시간여행의 설계자 앙투안의 초대로 하룻밤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빅토르의 '벨 에포크'는 1974년, 자주 가던 단골 카페에서 운명적 사랑을 마주한 그 날이다. 몇 십년 전 그 카페에는 지금처럼 직장에서 쫓겨 나고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불행하기만 한, 주름 자글자글한 늙은이가 아닌 미래를 꿈 꾸며 사랑을 위해 온 몸을 내던지던 젊은 한 청년이 있었다. 앙투안의 시간여행 프로젝트를 통해 그때 자신이 사랑했던 그 여인을, 그때 그 호시절을 다시 마주한 빅토르는 잊고 있었던 옛 감정과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빛 바랜 현재의 일상을 회복해간다.



  이 영화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가는 공상과학 장르가 아니다. 일반적인 로맨스물도 물론 더더욱 아니고. '핸드메이드 시간여행 로맨스'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 영화는 '고객의 가장 행복했던 과거의 추억을 100% 재현해주는 이벤트 회사'가 있다고 상정하고, 관객을 아날로그 감성 여행에 초대한다. 주인공의 과거 나들이를 지켜보며 관객들은 1970년대 그 특유의 감성에 푹 빠지게 됨과 동시에 '나의 벨 에포크는 언제일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이 특별한 시간여행은 우리를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이나 향수에만 마냥 젖게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익숙함에 속아 현재의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주인공 빅토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는 한때 잘 나가는 만화가였던 빅토르가 자신의 행복했던 그 시절 추억을 그림으로 그리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사랑했던 여인과 함께 한 순간들을 그리기도 하고 그녀의 미소, 붉은 머리칼, 춤추는 실루엣을 스케치하기도 하면서. 그의 드로잉들이 실제 장면으로 구현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 또한 이 영화의 묘미 중 하나다.


  영화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 창밖을 내다보다 문득, 빅토르의 그림들을 떠올렸다. 그러곤 나의 벨 에포크를 그림으로 그려낸다면 어떤 장면일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들


(좌)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 1872  /  (우) 베르트 모리조, 와이트 섬에서의 외젠 마네, 1875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자신만의 섬세하고 따뜻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려낸 여성 화가다. 그림은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그 시기에 그녀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비운의 화가였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만큼은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곤 했다. 여성은 화가로서 다양하게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주로 집 안의 풍경, 가족과의 일상을 그렸던, 그렇지만 죽을 때까지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모리조. 그녀는 출산한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인상파 전시회에 꾸준히 출품하며 인상회화의 발전에 일조하기도 했다.


  모리조는 그림뿐만 아니라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와의 특별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뮤즈이자 모델로서 마네의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 둘의 특별한 교류는 영화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에도 잘 나타나있다. 그녀는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하여 '줄리'라는 어여쁜 딸을 슬하에 두었다. 줄리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그녀의 그림에서 종종 발견된다.


베르트 모리조, 소녀와 개, 1886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한낮,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있다. 강아지를 품에 두고 쓰다듬는 소녀의 옆모습에는 고요함과 평온함이 느껴진다. 살짝 노곤한 것인지 오후의 기분 좋은 나른함을 즐기는 듯한 소녀와 강아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자신의 딸 줄리를 그려낸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이 평화로움은 섬세하고 따뜻한 붓터치와 색감을 통해 극대화된다. 그림에서 느껴지듯이, 그녀의 딸 줄리에게 가장 행복했던 '벨 에포크'는 이 시기였던 것 같다. 줄리 마네는 훗날 어머니 베르트 모리조와 그녀의 인상주의 화가 친구들을 회고하며 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래장난을 하고 있었다. 내게 있어서 최고로 행복한 때였다.
어머니가 '만약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할 거니?' 하고 물으셨을 때 '난 계속 모래장난을 할 거야'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베르트 모리조의 딸 줄리 마네


베르트 모리조, 딸(줄리)과 함께 있는 외젠 마네, 1881

  그래서일까? 모리조의 그림들을 보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아버지와 소꿉놀이를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거나 어머니와 산책을 하는 줄리의 모습은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없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유년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책을 읽거나 강아지를 고 생각에 잠긴 딸의 모습을 포근한 무드로 그려낸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그림들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간질간질하게 만든다. 그러다보면 '역시 난 아직도 덜 자란 '어른이'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에 이른다.



우리 각자의 벨 에포크


  영화에서처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은가. 사실 이런 질문은 살면서 종종 주변에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아직 살아온 날이 빅토르만큼이나 길지는 않은지라, 글쎄- 딱히? 하고 넘겼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거나 과거로 도망가고 싶을 만큼 현실이 괴롭거나 고달프진 않아- 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와 모리조의 그림들을 보고 나서는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현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 가지고 사는 것도 참 근사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림 속 소녀는 아마도 모리조의 딸 '줄리'라고 추정된다  /  베르트 모리조, 책 읽는 소녀, 1888

  어린 시절 나는 책을 참 좋아하던 아이였다. 정말 책이란 책은 '닥치는 대로' 다 읽었던 것 같다. 잠들기 전에는 빨리 다음 날 일어나서 책을 읽고 싶어서 얼른 꿈나라로 향했고, 해가 뜨기도 전인 어스름한 미명에 불도 켤 줄 모른 채 책장에 코를 박으며 탐독하곤 했다. 그런 내가 눈이 나빠질까봐 아침마다 제 방문을 살짝이 열고 불을 켜주시던 부모님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을 게다. 학교에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공기 놀이, 고무줄 놀이를 하는 것보다 책 읽는 게 더 좋아서 늘 학급문고 앞을 서성거렸다. 다행히 마음씨 고왔던 그때 그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상히 여긴다거나 멀리하기 보다는 '맛있는 거 사줄게! 제발 같이 놀자'하며 내 팔을 끌어주곤 했다. 우습게도, 몸이 꿈뜬 독서광이었던 그 소녀는 고무줄 놀이를 하자마자 발 인대가 늘어나 엄마 손을 잡고 병원 신세를 져야했지만. 그래도 그 때가 참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콕 찝어 '이 때야!'라고 할 만한 그런 특별한 지점은 없지만 몽글몽글 피어나는 연노랑과 연보랏빛으로 물든 그 어린 시절이 내겐 '벨 에포크'로 남아있다. 아버지의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던 책장 앞에서 이름도 어려웠던 책들을 훑어보던 순간, 온가족이 바둑판 앞에 둘러앉아 오목이나 알까기를 하던 순간, 학교 끝나고 교문 앞에서 삐약삐약- 쉴새없이 쫑알거리던 샛노란 병아리들을 구경하고 이내 문방구로 달려가 친구들과 불량식품을 사먹던 순간, 일요일이면 부모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녀온 뒤 이탈리안 퓨전 레스토랑에서 포식하며 볼록한 배를 두드리던 순간들까지.. 지금은 그 레스토랑도 사라지고 어린 그 시절도 흘러가버렸지만 그런 순간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빚어냈을 테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각자의 벨 에포크'를 간직하며 살고 있는 것이리라.


  혹 반복되는 일상의 익숙함에 속아 현실의 소중함을 잃어가고 있다면 한번쯤은 되돌아 보자.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하고 반짝이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불현듯 깨닫게 될 지도 모른다.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은 어떤 특별하고 황홀한 이벤트의 연속이 아니라, 주변의 소소한 기쁨에 감사하며 웃음 지을 줄 알던 순수했던 시절이라는 것을. 그 아름다운 시절로 눈을 감고 잠시 돌아가 추억여행을 떠나보길 바란다. 뒤엔 우리 모두 매 순간순간을 '벨 에포크'로 여기며 살아가게 되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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