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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Aug 08. 2020

김길후,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한 블랙 페인팅

대구의 현대미술가, 김길후 작가와의 만남

대구의 화가, 김길후 작가를 만나다


김길후, 사유의 손(The Thinking Hand), 2010


김길후 작가님과의 만남은 그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철학만큼이나 '무계획적'인 것이었습니다.


가창 동제 미술관&갤러리 카페


지인들과 방문한 대구 근교의 가창 '동제 미술관'. 카페인지 미술관인지 모호할 정도로 사면 가득 그림들로 채워진 공간이었죠. 그림을 먼저 보아야 할지, 일단 앉아서 차라도 한 잔 호로록 마셔야 할지 망설이던 그 순간,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한 분이 다가왔습니다.



"그림 보러 오셨나 봐요? 제가 소개해드릴까요?"



카페 주인이신가..? 고개를 갸웃- 하며 따라나선 우리는 그를 따라 카페 바로 옆 하얀 담벽의 건물로 들어섰습니다.


김길후 작가 작업실


비에 젖어 유독 싱그러운 초록빛을 뿜어내는 수풀 사이로 수줍게 드러난 흰 담벼락, 노오란 가로등과 빨간 대문이 인상적인 이 곳. 입구에 걸린 문패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소개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김길후 작업실 또는 집>


그 사람 좋은 미소를 풍기던 이는 이 미술관 또는 작업실의 주인공 '김길후' 작가님이었고, 이곳은 그의 갤러리였던 게지요. 대구 및 중국 베이징에서 작업하고 계시는 김길후 작가님은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 및 단체전,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시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신 대구의 현역 작가십니다.


기분 좋은 우연 또는 인연으로, 화가 김길후의 작품 세계를 그의 설명을 통해 직접 만나볼 수가 있었습니다.






블랙 페인팅, 있는 그대로 날 것의 감정을 표현하다


그림을 보기에 앞서, 여러분께 질문 하나만 드려볼게요.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사랑할 수 있나요? 여러분 안에 있는 감정이 모두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길후, Black Tears 연작, 2003


물론 아닐 겁니다. 때론 우울함, 두려움, 분노와 같은 감정들에 휩싸일 때도 있고 이에 이길 때도 질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다 '행복해 보입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요. 자신을 위해서든, 주변의 다른 이들을 위해서든 그렇게 아름답고, 좋은 감정들만 내보이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김길후, The Sage of the Moon, 2013


김길후 작가는 그러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직접 마주할 것을 자신의 그림을 통해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련의 '계획된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지요.


무언가 질서 정연하고 계획적인 세계와 그림에서는 그 어떠한 본연의 감정도 느낄 수가 없다고, 결국은 '형태'가 무너지고 없어져서 '강렬한 감정의 흔적'만이 분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술은 정해 놓은 질서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다음 세계를 보여주어야 하지요.

다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김길후 작가와의 대담 中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점점 '색'과 '형'이 사라지고, 무(無)를 의미하는 '검정'과 몇 획의 '선'만이 남습니다. 이런 그의 그림은 '블랙 페인팅'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아직 물감이 채 다 굳지 않은 듯한 최근 작업물


그의 그림을 처음 딱 마주하면 막막합니다. 당혹스럽습니다. 검정 캔버스에 황망하게 그려진, 아니 휘갈겨진 듯한 하나 또는 몇 개의 선.. 형상도 없고 무얼 표현한 건지, 어딜 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공기를, 분위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어둠의 추상..



그는 그저 자신 내면의 어두운 감정들을 토해냈다고 말합니다. 심연의 깊은 공포, 두려움, 슬픔, 화.. 이러한 감정들은 '동그라미를 어느 크기로 그리고, 네모를 화면 어느 쪽에 배치하고'등과 같이 계산하고 재어서 표현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입니다.


음..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슬프고 힘들 때, '지금부터 딱 5분간, 양 쪽 눈에서 200mL만큼의 눈물을 흘려야지' 하거나 혹은 '분노 게이지를 60으로 올리고 목소리 크기를 70 데시벨로 높여화내야겠어' 하지는 않잖아요..?


그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의 감정을 표현했기에 조금 불편하지만, 아주 솔직합니다.






추하고 불쾌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



하지만 김길후 작가의 설명을 듣고서도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게 미술이야..? 아름답나? 미술은 그래도 예쁘고 보암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각양 각색의 재료들이 서로 얽히고 섥힌 사이로 어떤 인물의 얼굴을 찾았다. 마치 그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는 것 같았다.


작품을 향한 그러한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듯 김길후 작가는 자신의 조각 작품들 앞으로 우리를 인도했습니다.



이 작품을 한번 보세요.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이왕 만들 거 좀 예쁘게 만들지! 하고요.

하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예술이 꼭 아름다워야 합니까?
예쁘게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저 작품으로 내 삶을,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뿐입니다.



산에서 아무렇게나 주워 온 나무 조각, 스티로폼, 박스와 같이 가공되지 않은 재료로 만들었다는 이 조각상을 들여다보며 그 안의 감정을 읽어보려 했습니다. 특정한 어떤 것에 영감을 받거나 계획하지 않고, 작업하는 도중에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여 우연적이고 즉각적인 작품을 제작한다는 작가의 마음을..


누군가는 '초등학생의 방학 숙제' 정도로만 여기고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확신에 찬 말들을 듣고 나니 어쩌면 그는 자신의 아름답지도 그럴싸하지도 않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마주하고 표현해내는 용기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슬며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김길후, 사유의 손(The Thinking Hand), 2010


그리고 마침내, 작가 스스로 인생작이라 말하는 작품 <사유의 손> 앞에 섰습니다.


사람 키에 맞먹는 크기의 캔버스 위에는 못으로 긁고 바늘로 파낸 듯한 상처와 흉터가 가득합니다. 그 위로 짙고 반짝이는 펄 블랙이 뒤덮여 있고요. 작가는 여기서도 인물이나 배경 보다도 날 것 그대로의 감정, 느낌을 표현하는 데 주력합니다.


깊고 어두움, 고요함, 휘몰아치다가 이내 침잠하는, 다소 추하고 불쾌한 감정들.. 검정이 이토록 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색이었나 자문하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계속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마침내 검은 장막이 걷히고, 내면에서 들끓는 감정의 상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두 손 모은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유의 손> 앞에서 작가님과 한 컷. 실제로 보았을 때 아우라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김길후 작가에게 'Black'은 모든 것을 드러내는 동시에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는 표현방식입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어두운 단면이 아닌 그 뒤에 가려진 무수한 빛의 단면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Black은 모든 색을 흡수한 색이기도 합니다. 작가에게 Black은 우울, 고통, 시련, 희망 등 모든 감성을 흡수하는 색입니다.

- 큐레이터 백순진의 평론 中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진실


김길후 작가에게 Black, 검정은 모든 것을 드러내는 동시에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는 색입니다. 또 검정은 우울, 고통, 시련, 희망 등 모든 감정을 흡수하는 색이기도 하지요.


그에게는 검정이야 말로 가장 솔직하고 진실된 삶의 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폭에 보기 좋고 예쁜 색깔의 감정만 따로 떼어 칠하지 않고, 온갖 모든 감정을 싹싹 긁어모아 섞었더니 결국은 '검정'이 남더라.. 하는 자기고백 같은 느낌이 들었달까요.


(좌) 백합일기, 2011 / (우) 백합일기, 2015

마지막으로 작가의 연작 작품 하나 소개하고 마칠까 합니다. 그는 <백합일기> 연작에서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제작하여 '그림을 통한 진실' 즉 순수한 본연의 감정을 소박하게 담아냅니다.


백합을 아기 안듯이 품 안에서 안아 보기도 하고, 두 손 가득 소중히 감싸며 얼굴을 조심스레 맞대어 보기도 하는 그림 속 인물들을 보며 '아름답지 못한 내 감정, 내 모습'도 백합처럼 보듬어 주어야겠단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거칠고 서투르지만 가장 순수한 나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김길후 작가님과 뜻밖의 즐거운 만남을 가졌던 동제 미술관에서의 추억. 언젠가 또 다른 전시에서 작가님의 작품을 만나게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앞으로 종종 대구의 작가님들과 작품들도 소개해드리도록 할게요 : )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합니다. 장마가 끝날 듯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네요. 혹시 폭우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분들은 없으신지 걱정입니다.


모쪼록 건강 유의하시고, 평안하고 예술적인 주말 보내셔요-!



by. 아트소믈리에 지니



*작가 소개

일상의 어느 한순간에 포착된 생각에 그림 인문학을 곁들여, 삶을 담담히 풀어내고 위로하는 글을 씁니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가 한 편의 예술이 되면 좋겠습니다.





본 글은 비영리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저작권은 작가 및 소장처에 있습니다.

reference

 -대구미술관 및 동제미술관 홈페이지

 https://artmuseum.daegu.go.kr/main/index.html

 -포항시립미술관 홈페이지

 http://poma.pohang.go.kr/p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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