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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May 08. 2020

그림을 보고 눈물 흘려본 적 있나요?

마크 로스코, 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이 그림

미장센, 작품 속 등장하는 그림들


 (좌) <노팅힐> 속 샤갈의 그림  /  (우) <007 스카이폴> 속 윌리엄 터너의 그림

미장센(Mise-en-Scene)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신 단어지요?

연극에서 무대 위에 보이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의미 있게 구성하여 연출하는 것으로, 요즘은 연극뿐만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이 미장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감독들이 자신의 연출 의도를 단순히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로만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멋스럽지도 않구요.


그래서 장면 속 배경을 통한 시각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위의 영화 <007 스카이폴> 속 윌리엄 터너의 그림이나, <노팅힐> 속 샤갈의 그림처럼 말이에요. (조만간 글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처럼 장면 하나하나 속 무심코 지나칠 법한 그림이나 구도, 벽지 등의 소품을 통해 감독의 숨겨진 의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 미장센입니다.



저는 미술을 좋아하다보니 아무래도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림에 눈이 자꾸만 가곤 하는데요. 최근엔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 속 그림이 눈에 들어왔지요. 아마 재밌게 보고 계신 분들, 여기도 계시겠지요? 혹시 저와 같이 이 그림을 눈여겨보신 분도 있으실까요?



한때는 부부였던 선우(김희애)와 태오(박해준). 하지만 태오의 외도로 이 결혼생활은 산산조각나버리고 이젠 애증의 관계가 되어버렸는데요.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수록 깊어져가는 서늘한 갈등의 골과 치밀한 심리 묘사가 압권입니다. 그 중 한 장면에서 등장한 그림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군요.


바로 추상 표현주의, 색면화가로 유명한 현대미술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입니다.


마크 로스코, 무제, 1951

선우와 태오가 감정이 극에 달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벽에 걸린 로스코의 그림은근-하게 담아냅니다. 그리고 점점 갈등이 고조되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그림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며 극의 분위기를 극대화시키죠.


이 장면 속 마크 로스코의 이 그림, 대체 어떤 그림이며 왜 등장한걸까요?





감정을 오로지 '색'으로 표현한 색면화가



오늘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제작년도'를 먼제 제시하겠습니다. 시기가 중요한 화가라서요..^^ /  (좌) 1951, 무제  /  (우) 1950, 화이트센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 일단 '당황'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얼 그린거지?
뭘 봐야 돼..?


작품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난감해하며 결국 '역시 현대미술은 어려워!' 하고 좌절감을 갖게 되죠. 어떤 형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색덩어리들-대충 칠한 듯 색의 경계조차 흐릿한-을 보고 심지어는 '내가 그려도 이것보단 낫겠는걸?'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갖게 하고요. (그 중 1인이였던 저, 여기 손 듭니다..)


마크 로스코, 그는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어서 이러한 작품을 그린 걸까요?


 (좌) 1944, 바닷가의 느린 여울  /  (우) 1935, 지하철 입구

그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여전히 난해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고대 신화'에 영향을 받은 그는 추상적인 표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니체의 허무주의 철학과 비극적 고대 신화들이 가진 숭고함, 불완전성이 오히려 인간의 공허함을 성숙시키고 해소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음.. 조금 어려운 말인데요. 조금 풀어보자면, 허무함과 공허함, 완전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생기게 되고 이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는 것입니다.


Utitled, 무제 시리즈  (좌) 1950, 무제 / (우) 1949, 무제

그래서 자신이 받은 인상과 감정을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하고,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것을 그만둡니다. 바로 그 유명한 <무제(Untitled) 시리즈>의 등장! 두둥..!


때문에 '색채 표현이 극대화된 추상예술'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로스코는 고개를 저었죠. 자신은 어떤 형태나 특정한 색이 아닌, '인간의 본연적 감정'을 그린 것이라 말하면서요. 로스코는 작품 속에 '감정'을 표현하고 이것을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느끼길 원했습니다.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 이것은 로스코에게 영원한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나 봅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나는 색채나 형태나 그밖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 없다. 나는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왜 우리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가


여러분은 미술작품을 보고 강렬한 감정에 휩싸여본 적이 있으신가요? 여기 미국의 한 갤러리에서 진행한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가 있습니다."당신은 미술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그렇다"고 대답한 사람들 중 70퍼센트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답했는데요.



제 주변에도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숨이 막혔다- 는 지인이 있는가 하면, 아이돌 방탄소년단의 한 멤버는 실제 그의 그림을 보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스티브 잡스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사랑했던 로스코의 그림은, {무섭다, 평온하다, 슬프다} 등 각 사람마다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대체 왜 그런 걸까요?


난 예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왔다


작품의 크기는 생각보다 큽니다. 오른쪽 작품의 경우 가로168x세로208(cm). 실제 이 작품을 두 눈으로 마주할 때 오는 압도감이 있겠지요?

로스코는 한층 더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기존의 미술양식으로는 현대인의 감정을 담아내기 힘들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감정을 담아내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냈죠. 바로 극도로 단순화된 '색'입니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아무렇게나 나열된 듯한 , 그리고 , 또 다른 .. 하지만 이내 우리는 이 아득한 색의 향연에 압도당하기 시작합니다. 말문이 턱 막히고 각자 자신만의 심연, 즉 깊은 내면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내 그림 앞에서 감정을 터뜨려 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내가 그림으로 소통한 순간이다. 내가 그 그림을 그릴 때 느꼈던 일종의 종교적 경험과 동일한 체험을 하는 것이다.



색면화, 즉 색으로만 구성된 로스코의 작품은 관객에게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림 앞에 머무르며 슬픔을, 또는 숭고함을, 압도적인 먹먹함을 느끼도록 만들면서 말입니다.





눈으로 보지 마세요. 마음에 양보하세요.


나는 관람자들이 몇 분 동안 내 작품을 응시하길 바란다. 그 후엔 단순히 그림을 넘어 깊은 내면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난 내 작품이 그런 작품이 되길 원한다.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때 특별한 감상법을 제시했습니다.

일명, <45cm 거리에서 바라보기>! 


어느 정도 거리인지 감이 잘 안오신다구요? 팔을 쭉 뻗었을 때 겨드랑이에서 손끝까지가 대략 50cm 정도이니, 꽤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거리에선 장장 2m에 달하는 거대한 그의 작품을 한눈에 감상할 수 없겠죠. 그는 왜 이런 특이한 감상법(?)을 요구했을까요? 여기엔 마크 로스코 작품세계의 핵심 가치인 '소통''치유'의 메세지가 담겨 있습니다.


마크 로스코는 일반적으로 작품을 보러 가는 전시개념에서 벗어나 회화와 관람자간의 완전한 만남의 체험을 추구한다. 작품과 마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근원적 감정을 만나 기꺼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기적같은 감동, 특별한 치유력은 마크 로스코 작품이 지닌 핵심적 가치이다.  
-마크 로스코전 해설평


로스코 채플(The Rothko Chapel)  저 벤치에 앉아서 그림을 보면 어떤 느낌일까요?

관객과의 완전한 만남과 소통을 중시했던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이름도 기깔나는.. 

로스채플..!


공간 디자인, 크기와 규격, 앉아 감상할 벤치, 조명의 각도와 밝기까지 세밀하게 그가 직접 참여하여 제작하였고, '생애 동안 방문해야 할 가장 평화롭고 신성한 장소'에 선정되기도 했다고 하니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 이곳에 가면 왠지 그의 작품이 주는 강력한 감정에 더 푹- 빠지게 될 것 같지 않나요?





끝끝내, 블랙은 레드를 삼키지 못했다.


내가 삶에서 걱정하는 것은 딱 하나, 검정이 빨강을 집어 삼키는 것.


휴우- 이제 이 기나긴 마크 로스코 작품세계의 여정도 곧 끝이 납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과 함께요.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의 작품들은 극도로 암울합니다. 왠만하면 색에 대한 거리낌이 없는 저조차도 가볍게 보기 힘들 정도로요.


(좌) 1961, 무제 / (우) 1962, 무제

앞서 비교적 밝고 어두운 채도가 균형을 이루고 있던 전작들과 달리, 딥(deep)한 색감들이 올라오고 있는게 확연히 느껴지시지요? 연속된 이혼, 화가로서의 반짝 성공 후 체감되는 부담감과 두려움, 팝 아트 작가들과 대조되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압박감 등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눈에 띄게 어두워집니다.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것, '검정빨강을 집어 삼키기 전'에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피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별명이 있는 그의 유작.. / 1970, 무제(Red on Red)

그의 마지막 작품은'검정'과도 같은 어두운 감정들을 이겨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기라도 하듯 눈이 시릴 정도로 새빨간 색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아.. 더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느껴 보세요. 로스코의 작품은 사실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니까요. 그가 그토록 원하던 대로 작품과 맞대어 소통하고 만나고 마음껏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심연과 감정을 '직접' 만나봐야지만 하는 것이지요..!





<부부의 세계> 속 마크 로스코 그림의 의미는?



다시 <부부의 세계> 이야기로 돌아와서,

선우와 태오의 감정이 극에 달하는 순간 벽에서 떨어져버린 로스코의 그림! '감정'을 집요하게 담아냈던 그의 작품이 하필 이 장면에서 추락하는 모습은 앞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가 더 격정적이고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이자, 현재 그들의 감정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장치인 듯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 그림으로 인해 앞으로의 전개가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이 장면과는 상관 없이..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실내 장식, 홈 인테리어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어요. 마음에 드시는 작품 하나 골라서 벽에 걸어 두시고, 커피 한 잔과 함께 여러분 내면의 세계에 푹- 잠겨보시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니까요!


드라마 <부부의 세계>방영되는 시간이 곧 다가오는군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린 마크 로스코의 그림 속 의미와 상징들을 곱씹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한층 더 맛깔스럽게 드라마를 감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의 《명화 브런치》는 이만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하고 예술적인 하루 보내세요ㅡ!



글. 아트소믈리에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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