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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Nov 29. 2020

불면의 밤엔 루소의 그림을 먹을 것

"그래도 꿈꿔야 하는 이유"

불면의 밤에 띄우는 편지


겨울 냄새가 난다고 느꼈던 게 엊그제인 것 같은데, 이젠 제법 완연한 겨울이네. 해가 많이 짧아졌어. 밤이 부쩍 길어졌고. 긴 겨울밤을 전전해야 하는 매년 이맘때면 나는 길고 어두운, 몹시도 춥고 축축한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느끼곤 해. 태생이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걸 좋아하는 나란 사람에게 서늘한 겨울밤은 너무 가혹하다. 어둠이 너무 일찍 찾아오기에, 도대체 언제 잠들어야 할지 도통 알아채기가 어려워. 그러다 잠 때를 놓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지. 요즘처럼 말이야.


불면의 밤을 보내는 너만의 방법이 있어? 예전의 난 어떻게든 잠들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 같아.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그저 그 불면을 '오롯이 느끼고 견뎌보고' 있어. 평소엔 바쁘다는 핑계로 못 다 했던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한 보따리씩 풀어놓으며 야금야금 꺼내 먹어보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곤 하더라.


앙리 루소, 사육제의 저녁(A Carnival Evening), 1886

최근의 밤들엔 너와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려보곤 해. 우린 줄곧 '꿈'에 대해 얘기했었지. 그 '꿈'들은 어찌 보면 조금 이상적이고 꽤 많이 추상적인 것들이었어. 넌 누구나 마음속에 작지만 원대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걸 이루지 못하고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말했지. 그러면서 우리는 모두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찾고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했어. 난 공감하며 꿈, 사랑, 용기, 믿음과 같은 인간 본연의 가치들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듯한 시대지만 그걸 끝까지 외치고 품은 채 살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 누군가에겐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 같다, 그치? 그런데 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가 새삼 좋더라. 그리고 한편으론.. 많이 부끄러웠어.


왜였을까? 그건 아마 흔들림 없이 확신으로 가득 찬 네 눈동자 앞에 선 내 모습이 마치 곧 꺼져버릴 촛불처럼 흔들거리고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일 거야. 대화 도중 문득문득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 하며 의심하고 회의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거든. 한편으론 '정신 차려. 꿈 깨, 바보야-' 하고 독설을 날리며 너의 야심찬 포부를 깨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까지 했다면, 너무 상처가 되려나?


그래도 우린 계속 꿈을 꿔야 하는 걸까? 불면의 밤을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건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잠자는 집시는 어떤 꿈을 꾸는가


잠들지 못하는 밤에 내가 이따금씩 펼쳐 보는 그림이 있어. 너도 아마 좋아할 것 같은데.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잠자는 집시>라는 작품이야.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 1897

꽤나 기묘하고 환상적인 작품이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어떤 여인이 잠들어 있네. 형형색색의 색동옷에 붉은 머리칼과 검은 피부.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나 고대 부족 신화에 나올 법한 신비로운 모습이야. 꿈이라도 꾸는 걸까? 곱게 감긴 두 눈 아래로 살짝 벌어진 입매는 잔잔하고 평온하기 그지없어. 아마도 깊은 잠에 빠졌나 봐. 아찔할 만큼 아주 가까이 다가온 사자의 숨결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어찌 보면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작품의 분위기가 묘하게 아름답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하지. 이들을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밤하늘의 보름달이 마법이라도 부리는 걸까.


난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작품 속 배경이 현실일까 아니면 꿈속일까 궁금해하곤 해. 결국은 사막을 헤매다 지쳐 잠든 저 집시 여인의 꿈이 투영된 것이리라 결론을 내리지. 사막에 갑자기 사자가 나타나는 것도, 그런 사자가 그녀를 잡아먹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사실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이 그림이 좋아. 현실과 비현실, 아니 초현실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매혹적인 한 편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받거든.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
만돌린을 연주하며 방랑하는 집시 여인이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의 곁엔 물항아리가 놓여 있다. 때마침 지나가던 사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의 냄새를 맡아보지만 잡아먹진 않는다. 삭막한 사막에는 달빛만이 고요히 그곳을 비춘다.


이 작품 <잠자는 집시>에 대해 루소는 위와 같이 설명했어. 마치 신비롭고 비밀스런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지 않아? 그는 여기에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는 부제를 덧붙였어. 그런데 나는  부제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지쳐 쓰러져 있을지라도 꿈을 꾼다면 잡아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꿈꾸지 않으면 우린 잠식되고 만다'라고 말이야.


왜냐하면 '꿈꾸는 화가'였던 루소의 삶 자체가 그의 작품에 담긴 메세지와 꽤나 닮아 있기 때문이야.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


49세의 중년 세관원이던 루소가 느닷없이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놀라는 걸 넘어 어처구니가 없었을 거야. 퇴직 사유가 글쎄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서'였거든. 예술과는 일면식도 없는 공무직에 평생 몸 담은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그림이라니? 그러나 루소의 뜻은 확고했어.


(좌) 앙리 루소  /  (우) 램프가 있는 화가의 초상(Self-portrait of the Artist with a Lamp), 1903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루소는 이전부터 '화가'라는 꿈을 품고 있었어. 40세 즈음에야 그 꿈을 조금씩 펼치기 시작했으니 조금 늦은 감이 없진 않지. 게다가 한 번도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그였기에 그 시작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어.


독학으로 공부한 티를 내기라도 하듯 어색한 인물 묘사와 신체 비율, 그리고 지나치게 세밀한 배경 묘사가 특징인 그의 그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진 않아. 과장된 동세와 엉성한 원근감, 구도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느낌을 주지. 그의 우스꽝스런 작품들에 사람들은 적잖은 조소를 던졌고 평단의 시선 역시 냉담했어.


(좌) 바위 위의 소년(Boy on the Rocks), 1895–1897  /  (우) 풋볼 선수들(The Football Players), 1908

루소를 좋아하는 나도 그의 인물화에는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 나오곤 해. 정극을 가장한 콩트를 보는 기분이랄까? 뾰족한 바위들 위에 걸터앉은(또는 공중부양 중인..) 소년을 좀 봐. 익히 30대는 되어 보이는 다소 올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몸의 비율은 기껏해야 4-5등신의 꼬꼬마 수준이네. 그런가 하면 풋볼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마치 그대로 멈춰라! 하고 익살스런 놀이를 하는 장면 같아. 오죽하면 그의 인물화엔 '실제 인물과 전혀 닮지 않은 초상화'라는 오명이 붙기까지 했다니까.


그렇지만 루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도,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미적 기준에도 흔들리지 않았어. 자신이 화가로서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갔지.


(좌) 이국적인 풍경(Exotic Landscape), 1908  /  (우) 즐거운 어릿광대들(The Merry Jesters), 1906

독학파인 그에게 유일한 스승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연'이었을 거야.(루소曰 '자연 외에 내게 다른 스승은 없다!') 루소를 지금의 명성에 놓이게 한 것도 바로 그의 '정글' 시리즈였지.


농밀한 풀빛 초록색이 온통 화면을 뒤덮고 있어. 이국적인 초목들이 무성한 이곳은 아마도 열대 우림일까?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태고의 원초적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것만 같아. 울창하게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야생의 동물들. 젖과 꿀이 흐르고 오직 자연의 법칙만이 이곳을 지배하는 아주 강렬한 작품들이야.


앙리 루소, 뱀을 부리는 주술사(The Snake Charmer), 1907

루소는 빽빽하게 우거진 원시림과 야생동물들로 가득한 이국적인 자연을 매혹적으로 표현했어.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기보다는 루소 특유의 환상적인 화풍을 더해 초현실적인 정글로 재해석했지. 그림을 가만히 한번 들여다봐. 미풍에 나뭇잎이 사각이는 소리, 뱀이 스스스- 수풀을 스치며 지나가는 소리, 개구리와 물새가 나지막이 울어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


사람들은 이 생생한 작품들을 보고 그가 날것 그대로의 자연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여기엔 그럴싸한 루소의 거짓말과 과장이 보태졌지. 하지만 그의 주장과는 달리 그는 한 번도 프랑스를 떠난 적이 없었어. 모두 자신의 상상에 기반했을 뿐. 대신 루소는 작품의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을 수시로 드나들며 야생의 이국적인 풍경동식물을 관찰하고 스케치했어. 박제된 야생동물을 보며 수없이 그림 공부를 하고, 관련된 자료와 사진들을 찾아 세심히 습작하기도 했지.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 간다

-앙드레 말로


모두가 그를 향해 '일요 화가(전문 화가가 아니라는 의미)'라고 손가락질하며 그의 꿈을 비웃었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꿈을 꿨어. 언젠가 성공한 근사한 화가가 되리라 스스로 확신하며 멈추지 않았지. 그리고 끝끝내, 그는 자신이 그려낸 꿈을 닮게 된 거야.





불면의 밤엔 루소의 그림을


'잠잘 때 꾸는 꿈'과 '미래의 무언가를 바라며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 전자와 후자의 두 의미가 대부분의 나라에서 같은 단어로 사용된다는 걸 알고 있어? 꿈, dream, ゆめ, rêve.. 말도 안 되는 허황된 꿈을 꾸지만 한편으론 이를 실현하려 애쓰는 게 우리네 인간의 모습이라서 그런가 봐.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금은 '꿈꾸는 힘이 약해진 시대'인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 꿈을 꾼다고 한들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과거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이미 체득해버린 탓이려나. 아님, 어쩌면 이것 역시 좁은 문으로 가지 않으려는 나약한 우리들의 비겁한 초상이려나.  보며 스스로를 향해 느꼈던 그 '부끄러움'도 이러한 내 모습에서 기인한 것일 테지.


앙리 루소의 자화상(Self Portrait), 1890  /  자신이 화가라는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이토록 곳곳에서 묻어나는 작품이라니..!

그래도 꿈꿔야 하는 이유를 루소의 그림에서 찾고 싶다.


다른 화가 지망생들이 그 당시 유행하던 고전주의, 인상파 화풍을 모사하기 위해 유명한 화가의 화실이나 미술관을 전전할 때, 자신만의 꿈과 철학과 작품 세계를 펼치기 위해 조금 다른 길을 택했던 루소처럼. 늦고 느리고 서툴지만 무소의 뿔처럼 우직하게 꿈을 그려나간 어느 몽상가처럼. 그리하여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나이브 아트, 원시적이면서 이국적인 초현실주의와 독보적인 화풍을 완성했던 이 위대한 화가처럼. 그래도 한번 꿈꿔보자.


앙리 루소, 꿈(The Dream), 1910  /  이국의 낯선 식물을 볼 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by. 앙리 루소

네가 편지에 적어 주었지. '힘들어도 흔들리지 말고 버텨 달라'고. '당신의 가치관, 신념, 삶의 태도로 인해 외롭고 고된 사투를 해야 할 일이 과거에도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있겠지만 결국은 승리하게 될' 거라고. 응. 그래 볼게. 꿈과 사랑과 용기와 사람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서 써 내려갈게.


불면의 밤엔 루소의 그림을 꺼내 먹으며 오늘도 꿈을 꾸는 우리가 되길. 그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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