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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Jan 10. 2021

그 시절 올드 상하이를 '기억'하오?

조덕현 <에픽 상하이>, 기억의 예술법

응답하라 1930's 상하이


영화 <암살> 중, 상해 미라보 호텔에서 독립운동가 안옥윤은 책으로만 읽었던 커피를 난생처음 맛본다.

  이따금씩 커피가 사약처럼 쓴 날이 있다. 그럴 땐 시럽보다도 설탕 몇 숟갈이 딱이다. 애기 입맛이라며 분통 내듯 더욱 검붉어지는 사약물 위로 새하얀 알갱이들을 신나게 털어 는다. 휘휘- 몇 번 젓고는 찻잔 끝을 톡톡. 아직 단 기운이 남아 있는 티스푼은 입 안으로 쓱 넣어준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도 그랬었는데 말이야. 부스스한 상태로 커피를 생명수처럼 들이키는 내 모습은, 남루한 옷차림에도 빛이 나는 전지현은커녕 뜨거운 신념으로 가득 찬 독립운동가와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그렇지만 달콤 쌉싸름한 커피로 작은 낭만을 찾는다는 점에서 조금은 비슷할 거라고 애써 우겨본다. 그녀가 처음 커피 맛을 보았던 그곳, 누구나 헛헛한 가슴에 로망 한 줌 품은 채 향했던 1930년대 '올드 상하이'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화려하고 유쾌하지만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상하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험이 부재한 나로서는 <암살>이나 <색, 계> 같은 영화로 그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더듬어볼 뿐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에 잔뜩 취해 웃고 떠들기 바쁜 세련된 모던걸과 모던보이, 영화산업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등장했던 희대의 영화배우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 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며 활동한 애국 투사들과, 암암리에 모여 온갖 정치적 암투를 꾀했던 공작원들까지.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격동지였던 이 도시의 빛과 그림자는 낯설고도 익숙해서 더욱 매력적이다. 우리의 뜨거웠던 역사와도 맞닿아있어서 그런 걸까.


1930년대 올드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색, 계>

  대구미술관에서 주관한 <조덕현: To Thee 그대에게 展>은 그 올드 상하이의 저변에서 치열하게 살아간 한 개인의 일대기를 그려내고 있다. 우선 작가 조덕현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주인공 ‘조덕현’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 인물의 삶을 추적하고 조명하는 과정을 통해 잊혀가는 상하이와 우리 근현대사의 역사적 순간들을 펼쳐 보인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또 기억한다는 건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을 은근하게 던진다.




<에픽 상하이>, 서사를 입은 그림


조덕현, 에픽 상하이(Epic Shanghai)-1935, 2017
주인공 ‘조덕현’은 1930년대에 세계 5대 도시로 일컬어지던 상하이에서 청춘을 보내게 된다. 식민지 조선 출신 난민으로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로 흘러 들어가 힘들게 밑바닥 생활을 하던 그는 1933년 여름, 자신이 끄는 인력거에 우연히 손님으로 태운 당대 중국 최고의 영화배우 '김염'의 소개로 영화판에서 일을 얻어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낯선 도시에 놓인 자신의 실존에 대해 생각한다.

-<조덕현 展> 전시해설 中


  <에픽 상하이>는 올드 상하이라는 낯선 시공간을 누비는 무명배우 ‘조덕현’의 이야기를 담은 초대형 작품이다. 1914년에 태어나 휘몰아치는 현대사 가운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다 1995년에 고독사한 조덕현이라는 인물 서사는 그의 발굴 프로젝트 '조덕현 이야기 3부작'을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실적이고 치밀한 내러티브 위에 그려진 <에픽 상하이>를 감상하다 보면, 얼핏 영화나 소설 속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 묘한 압도감에 심장이 날뛰어 남몰래 심박수를 재어본 건 안 비밀이다. 그런 나를 옆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본 것도 안 비밀이고.)


  아, 물론 작품 속 '조덕현'이란 인물은 가짜, 즉 그럴싸한 허구다. 캔버스 위에서 진실과 기억들로 아주 잘 버무려진.


(좌) 실존 인물 '김염'의 전성기 시절 모습과 그의 아내 '친이'의 노년 모습  /  (우) 롼링위의 젊은 모습과 죽은 후 장례 장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그림은 뒤통수 찌릿하게도 진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작품이다. 가상 인물 조덕현이 만났다는 '김염'은 반대로 실존 인물로서, 그 당시 상하이 영화계에서 '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쟁쟁한 한국계 배우였다. 독립운동가 아버지 '김필순'을 둔 김염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항일 민족사관을 가진 영화에만 출연했고 독립운동가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했다. 작품의 한가운데에 있는 극장 겸 댄스홀 <백락문>의 테라스엔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 김염과, 그의 아내 '친이' 여사의 노년기 모습이 동시에 등장한다. 옥상에선 가상의 무명배우 조덕현이 카메라 앞에 서 있고 말이다. 이것 참, 제대로 뒤죽박죽이다.


  건물 밖에선 상하이의 전설적인 여배우 '롼링위(완령옥)'의 살아생전 앳된 모습과 그의 자살 후 초상 행렬,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이 전경을 담고 있는 관광객모습이 화면 속에 공존한다. 이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눈 앞의 장면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헷갈리게 만들려는 명백한 의도다. 가인 '진짜' 조덕현은 관객에게 가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시공간의 왜곡 가운데 숨겨진 진실의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어가는 쾌감을 선사하고자 한다.


작가 조덕현
“우리 삶에도 가짜가 많죠. 옛날에는 다 진실이었지만 요즘은 페이크가 얼마나 많습니까. 리얼리티와 픽션이 섞여 있는 삶을 살고 있지요. … 저는 다양한 시공간 자료를 가져와 그것들을 한데 압축하는 방식으로 이것을 증폭시키고자 합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모아 진실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작가 조덕현


  '조덕현 발굴 프로젝트' 시작부터 참 재미지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이름을 심심풀이로 인터넷 검색창에 쳐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작가 역시 그러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또 다른 '조덕현'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수많은 조덕현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중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배우 조덕현과 연이 닿았다. 그를 기반으로 '영화배우 조덕현'이란 가상의 캐릭터를 가공한 뒤, 문학이란 장르를 통해 스토리에 입체적인 살을 붙인다. 소설가 김기창, 상하이 출신의 소설가 미엔미엔과의 협업으로 발표한 두 편의 단편소설들은 이 허구적 인물의 일대기에 더욱 탄탄한 내러티브적 서사를 불어넣는다.


  작가는 "요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며 이렇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게 됐다"며 "서서히 퇴장하는 세대가 있다. 이들에게도 한 번쯤 전성기가 있었다. 그 삶을 가상으로 꾸며봤다"라고 말했다. 기억의 습작에서 건져낸 허구 섞인 진실이 이토록 울림이 있는 것임을, 흑백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기억의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짙어지는


조덕현, 박싱 언박싱(Boxing, unboxing), 2017

  작가가 오래된 옛 사진에서 인물을 복원하고 가상의 역사를 발굴해내는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인생사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여읜 아버지를 오직 사진을 통해서만 기억할 수 있었던 유년시절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낡고 오래된 사진 속 인물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처럼 조덕현 작가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어디까지나 '기억'이다. 누렇고 빛바랜 흑백사진 속 형상들을 연필과 콩테로 세밀하게 그려가는 그의 드로잉 작업들은 결국 과거의 기억을 복기하는 과정이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흡사 사진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몇 미터가 넘는 대형 사이즈로 확대되거나 검고 어두운 박스 안에 담기면서 묘한 아우라와 나름의 서사성을 지닌다. 포착된 장면 너머 개개인의 사연과 삶의 희노애락이 전해지는 느낌이랄까. 더 나아가 문학, 고고학, 음악, 철학 등 다양한 장르와 융합되고 연계되며 그의 작품 세계는 기억이라는 메시지의 깊이와 너비를 확장해간다.


(좌) 조덕현, 음의 정원(The Garden of Sounds), 2020  /  (우) 조덕현, 1952; 대구 1-8, 2020

  작곡가 故윤이상의 곡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음의 정원>은 음악과 미술의 세련된 결합이다. 현대음악을 미술의 영역에 초대한 이 프로젝트는 '눈으로 보는 음악', '귀로 듣는 미술' 그 자체다. '자연의 커다란 언어에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윤이상의 글을 보고 감명한 작가는 그 잊혀진 작곡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연출했다. 윤이상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빛과 실루엣을 비롯한 다양한 시각적 요소가 가득한 이 공간을 거닐다 보면 정말 제목처럼 소리의 서성이는 기분이다. 특히나 정원 안의 음률적 풍경과 정원 밖의 실제 자연이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


  전시의 막바지쯤에 마주하는 <1952; 대구 1-8>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던 삶의 현장을 한 자락 들추어본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한 미군 장교가 1952년 대구 능금 시장에서 찍은 사진을 채색하고 재해석했다. 제목과 배경을 모르고 본다면, 결코 전쟁통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한 순간. 마치 대 전염병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매일매일의 일상을 지키며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싱그러운 능금꽃처럼 밝고 희망찬 봄날이 곧 다가올 거라는, 그러니 다시금 힘내어 보자는 지가 엿보이기에 더욱 끝맛이 여물다.


영화 <암살>

  영화 <암살>의 마지막 부분 즈음에 약산 김원봉은 목숨을 다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애도하며 이런 말을 한다.


 "(그들은) 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존재의 잊혀짐과 망각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애쓰고 수고하여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대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의 기억은 꽤나 '선택적'이어서 역사와 개개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대상이 있는가 하면, 언제 존재하기라도 했냐는 듯 어스름히 저무는 기억들도 있다. 잊혀지는 것들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지 못함에 가끔은 모골이 송연해진다.


  To Thee, 그대에게. 작가 조덕현이 이 전시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와 비슷하진 않을까. 기억되기를 선택받지 못한 존재들의 이야기로 과거의 '그대들'과 후대의 '그대들', 즉 우리들을 연결 짓고 싶었던 거라고. 자세히 보아야 아름다운  개인의 레퍼런스와 서사 다루고 아로새기는 작업에 그대들도 동참해보자 권하고 싶었던 거라고.. 기억의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희뿌연 전시장 서서 가만히 생각했다.


  큰 이유 없이,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칠 만큼 이 전시가 좋았다. 아마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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