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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May 13. 2019

[서평] <사람의 자리> (전치형, 이음, 2019)

언젠가 소방공무원의 안전에 대한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곳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한 대당 1억 5천만원을 들여 구매했다는 ‘소방로봇’이었다. 500도가 넘는 고온에서 1시간 넘게 버틸 수 있는 그 로봇은 인간의 몸을 가진 소방관이 들어가기 어려운 장소에서 구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대안처럼 보였다. 우월한 ‘몸’을 가진 로봇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 전시되는 그 앞에는 언제나처럼 야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소방공무원들이 앉아 있었다. 


2016년 뉴스에 따르면 30억이 넘는 돈을 들여 개발했다는 그 소방로봇을 실제 현장에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통제된 실험실에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던 그 우월한 몸이 촌각을 다투는 그 화재 현장에서는 오히려 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배터리와 무선장치의 고장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뉴스를 두고 어떤 과학자 동료는 말했다. “아직 프로토 타입이어서 그런 거예요. 20년뒤에는 다를 걸요.” 맞는 말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불편했다. 우월한 로봇이 전시되는 동안 예산이 부족해 불량 방화복을 입고 인력이 부족해 계속해서 연속 근무를 하는 소방관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전치형은 과학이 미래를 ‘독점’한 세상에서 사람의 자리를 묻는다. 인공지능 로봇인 소피아와 대화를 나누던 한국의 저명한 국회의원이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전향적인 입장에서 소피아에서 한국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 국회의원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 한국을 찾은 난민을 두고서는 전향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둘 모두 밖에서 온 낯선 존재인데, 왜 같은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창조물을 우리는 더 안전하고 심지어 친근하다고 느끼는 걸까. 인간은 외부적 요인이 통제된 실험실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요소가 뒤섞인 ‘더러운’ 세상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 인간의 몸에는 역사, 문화, 신념이 새겨져 있다. 그로인해 인간은 고귀한 동시에 위험한 존재가 된다. 그 불확실성은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이자 이유이기도 하다. 깨끗한 소피아는 난민이 될 수 없고, 그래서 인간도 될 수 없다. 


로봇은 인간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을 반영한다. 2010년 <타임>이 선정한 최고의 발명품 50선 중 하나인 잉키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개발한 영어 선생님 로봇이다. 백인 여성의 얼굴을 한 스크린으로 학생들과 만나는 잉키는 영어 교육이 전국민의 화두가 된 시대에 그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시골 지역에서 사용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기술적 발전을 한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면, 이 혁신이 한국사회의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잉키를 교실 바깥에서 원격으로 조정하는 인물은 필리핀의 한 콜센터에서 일하는 여성이다. 이 필리핀 여성은 백인 여성의 얼굴을 한 로봇을 통해서만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백인 강사만을 선호하는 한국의 인종차별은 잉키가 일하는 교실에서 또 한번 구현되고 강화된다. 


소피아와 잉키와 알파고의 시대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종종 양극단으로 나뉜다. 누군가는 과학기술이 가져올 장밋빛 미래에 앞서 열광하고, 또 누군가는 인간이 열등한 부속품이 될 디스토피아에 미리 좌절한다. 전치형은 그런 동시대의 현장을 찾아가 관찰하고 성찰한다. 이세돌을 가볍게 뛰어넘는 인공지능 로봇 앞에 두려워하면서도 열광하는 시민들에게 ‘인간이 실패하면 로봇도 실패’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스스로 완전하게 작동하시는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는 비현실이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가 만날 현실은 특성화고 실습생 이민호와 하청노동자 김용균의 일터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한해 SCI 논문 5만편을 출판하는 나라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일이 방치되는 일이 마땅한 지 질문한다.


2016년 3월 9일이었다. 그 날, 우리는 함께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 연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침몰한 배에서 친구를 잃고, 아직도 진도 앞 바다에서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지 못한 이들과 진행한 인터뷰 자료를 분석하는 회의를 힘겹게 마무리한 직후, 전치형은 짐을 꾸렸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세기의 대결을 펼치는 자리에 간다고 말했다. 텔레비전으로 보지 않고 왜 그 자리까지 직접 가느냐고 묻는 내 질문에 그는 답했다. “알파고가 수를 계산해서 착점을 결정하면, 그 지시에 따라 바둑돌을 대신해서 놓아주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을 보려고요.” 


그는 그렇게 세월호 참사와 알파고를 대하는 자리 모두에서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가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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