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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May 18. 2019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죽음의 공포와 악한 자가 승리하는 세상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며, ‘플라톤은 이 글을 왜 썼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었다. 물론 자신이 그토록 흠모했던 스승이 아테네 시민을 상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부딪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 장면을 기록하고 싶었던 마음이 그 기본 동기였겠지만, 철학자 플라톤의 글은 그렇게 사적인 회한으로만 해석할 수 없을 테니까. 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려 질문하면, 플라톤은 <변명>을 통해서 어떤 인식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걸까.


며칠전 <서양철학사>를 읽다가, 아름다운 답을 찾았다. 몇번을 소리내어 읽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관해서, 혹은 사악한 자가 행복하고 바른 자가 불행하게 되는 일에 관해서 엉뚱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금하려고 했다.” (<서양철학사>, 램브레히트 p71)


플라톤의 글은 소피스트들이 지배하는 사고방식과의 대결이었다. 소피스트들의 논리는 명확하고 직관적이었다. 당신과 나는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보편이 없는 이 세계에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내 욕망을 최대한으로 구현하는 길이고, 그를 위해서는 뛰어난 언변과 세련된 매너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세상은 X 같으니 내가 잘되고 봐야 한다. 출세하자.’는 말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특히,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기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후 정치적 쇠퇴를 겪던 시기였고, 소피스트들은 그 속에서 처세술을 가르치며 명성과 부를 쌓아갔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대해 말했고, 사악한자가 승리하는 세상에 대해 말했다. 이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감각에 의존에 세상을 겁박하는 이들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인간으로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죽음은 공포스럽고,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선한 자들은 줄곧 패배하고 악한 자들은 부귀영화를 누린다. 플라톤은 그러한 감각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에 관해서 “엉뚱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금하려고 했다” 


그럼, 인간은 그 사실들에 대해 어떻게 “엉뚱하”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스승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공포와 악한 자가 승리하는 세상을 인간으로서 살아낸 존재였고, 플라톤은 재판정에 선 스승의 목소리를 통해 감각적 세상 위에서 감각 너머의 지향을 구현하는 존재를 구현해낸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변론할만한 가치조차 없는 이유로 고소당한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걸고 죽음을 향해 걷는다. 


“왜냐하면 멜레토스도 아니토스도 결코 나를 해롭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못되니까요- 그 까닭은, 훌륭한 사람이 그만 못한 사람에게서 해를 입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그가 나를 아마 사형에 처하거나 추방하거나, 또는 시민권을 빼앗거나 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아마 그도 남들처럼 그런 일이 매우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오히려 나에게는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짓, 즉 사람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죽이려는 일이 더욱 악하게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


하기야, 그들은 소크타레스를 결국 죽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분노한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죽이는 일이었다. 그 죽음은 그를 해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훌륭한 사람이 그만 못한 사람에게서 해를 입는 일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허락되지 않’는 비극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사악한 자가 행복하고 바른 자가 불행하게 되는” 세상을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록된다. 그렇게 죽음의 공포와 악한 자가 승리하는 세상을 바르게 이야기하는 글이 수천년을 살아남는다. 


스승의 죽음 앞에 가장 나은 방식으로 소피스트들에게 복수한 청년 플라톤을 떠올려본다.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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