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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Jul 05. 202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두 번째 발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모임 두 번째 발제 (제1부)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얼룩소라는 도시로 온다. 도시의 이름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공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낙타/사자/아이라는 다양한 층위의 정신이 존재하고 상호 투쟁하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지형학적 비유로 생각된다. 


그 시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사회의 도덕을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는, 그렇게 삶의 무게를 짊어지는 정신을 욕하고 심지어 경멸하며 말을 시작한다.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서 짐이 가득 실리기를” 기다리는 존재들, 혹은 생활에서 검소하고 타인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게 엄격하고 지적으로 결벽인 이들을 그는 욕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국사회에서 바람직한 도덕으로 여겨지고 교육받았던 삶의 형태가 이 자리에서는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낙타 정신으로 묘사된다. 그 도덕은 자신이 창조해 낸 규율이 아니기에, 그 세계에는 자유가 없고 그 신성한 것 속에서 망상과 자의가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 부자유를, 그 외부적으로 강제된 도덕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자 정신은 “너는 해야 한다”에서 “나는 원한다”로 인식의 렌즈를 바꾼다. 그러나, 사자 정신으로는 삶을 축복하고 긍정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신성한 긍정. 무죄. 망각. 놀이”인 아이가 필요하다. 아이는 위버멘쉬와 가장 가까운 존재다. 책은 사자정신인 인간이 왜 어떻게 아이 정신에 도달해야 하고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한다. 니체는 철학자인 자신이 정신이 병든 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사라고 생각을 했고, 낙타 정신은 그 시대에 대한 진단명이고 이 책은 그 진단과 치료법이다. 


그 구분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아이 정신의 구현자, 즉 자신의 가치관과 도덕을 스스로 창조하고 신성하게 긍정하고 놀이로 여기는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외부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에 충실하고 그것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존재는, 반대로 이야기하면 독선적이고 독단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존재 아니던가. 그런 이가 권력을 가졌을 때, 세상이 얼마나 위험해지는 20세기 역사가 수차례 증빙한 바 아니던가. 


또 다른 위험성은 그 해석의 광범위한 자의성과 정신 승리의 가능성이다. 물리적으로 똑같은 행위를 하는 삶을 살아가더라도 그 태도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는 일의 이유에 따라 같은 일이 낙타, 사자, 아이 정신의 구현 중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라클 모닝은 사회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내면화된 자기 계발 논리에 따른 낙타정신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정신의 신체성을 이해하고 과거의 자신을 극복하는 사자정신일 수도, 그것이 일상으로 자리 잡힌 이후에는 그 자체가 놀이처럼 여겨지는 신성한 긍정의 행위인 아이 정신일수도 있다. 


낙타정신의 존재들, 조금 다르지만 극복되어야 할 인간말종이 스스로를 부자유의 세계로 구속하는 모습들을 책은 하나씩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한 잠이라고 말하며, 꿈 없는 단잠보다 소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를 위해서 낮의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갈등을 피하고 진리를 찾고 웃고 쾌활하게 살아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잘 자기 위해 깨어 있으라고 한다.”라는 그 가르침을 주는 “마흔 개나 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 현자는 바보다.”라고 말한다. 


잠에 대한 동경만큼이나 끔찍한 낙타정신의 사상은 죽음에 대한, 배후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그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고통과 무능력이 만들어낸 착각이다. 지난한 고통 속에서 헤엄치는 자들이 “단 한 번의 도약, 죽음의 도약으로 끝을 보려는 피로감”에서 그 정신적 고통의 대안으로 배후세계를 동경한다. 그런데, “대지에 절망했던 것은 신체”였고 “그 벗어남의 경련과 희열조차” 모두 대지와 신체 덕분이다. 그 존중과 경멸을 창조한 것조차 신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원인을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하고,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끝을 보기 위해 죽음과 사후 세계를 찾는다. 그들에게 현자들이 말한다.  “삶에 머무는 자는 바보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바보다! 바로 이것이 삶에서 가장 바보 같은 일이다!” 그런 세계를 받아들인 인간에게 근면이란 도피이자 자신을 잊고자 하는 의지다. 


플라톤 시기부터 유구하게 내려오는 인식/존재 이원론의 세계에, 이데아의 논리에 대해 니체는 뇌과학이 보여주는 정신의 신체성에 대한 학술적 근거가 매일 쌓이는 2024년의 기준으로도 과격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고, 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단지 신체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말에 불과하다.” “그대의 신체에는 그대의 최고 지혜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있다.”라고. 


이런 세상에서, 피로 글을 쓰고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영웅들을 내던지지 않고 최고의 희망을 신성하게 간직하기 위해서는 고독해져야 한다. 자신을 폄하하거나 자신에게 아첨을 하는 군중들로부터. “내 벗이여 고독으로 달아나라. 독파리들에 의해 쏘이고 쫓기고. 저들은 신이나 악마에게 하듯 그대에게 아첨을 떤다.” 그 군중들은 자신의 고통을 탓할 대상을 찾고 자신의 불안을 의탁할 존재를 구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그대의 성품이 너그럽고 올곧아서 “저들이 왜소하게 사는 것이 저들 탓은 아니지”라고 하면, 저들의 옹색한 영혼은 “모든 위대한 존재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벗이다. 노예도 아니고 왕도 아니어야 한다. “그대의 벗에게 그대는 위버멘쉬를 향한 화살이 되고 동경이 되어야 하니.” “그대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벗이 될 수 없다. 그대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벗을 가질 수 없다.” 위버멘쉬가 되는 다리를 함께 건널 수 있는 벗이 아니라면, 군중으로부터 독립해 고독해져야 한다. 위버멘쉬가 되는 과정은 과거의 자신을 경멸하고 파괴하고, 또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위버멘쉬가 되고자 하는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이단자가 될 것이며, 마녀, 예언자, 바보, 의심하는 자, 신성하지 않은 자, 악한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는 벗은 가장 훌륭한 적이기도 하다. 결핍된 자는 타인을 해치고 비난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는 자들은 그 과정에 함께 할 수 없다. 자신을 물어 독을 주입하고 도망하는 뱀에게 차라투스트라가 말한다. 너는 용인 나를 죽일 수 없다고. “뱀의 독 때문에 용이 죽은 적이 있더냐? 독을 다시 거두의 들여라! 내게 독을 선물할 정도로 너는 넉넉하지 않다.” 뱀은 아이정신을 가지고 충만함에서 움직이는 위베멘쉬가 아니기에, 그런 존재는 위베멘쉬를 해칠 수 없다. 이 말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피스트들에게 했던 말과 얼마나 또 어떻게 다른가.  “그들에게는 그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이 우월한 사람에게 해악을 입히는 일이 신의 법이나 인간의 법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버멘쉬에게 죽음은 도피로 찾는 환상이 아니다. 죽음은 적극적인 삶의 과정이자 실천이며, “죽음으로 인해, 내 벗들이 대지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죽음”이다. 이 모든 것은 아래의 한 마디로 요약된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가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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