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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Jul 27. 2019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역)

나는 소로우의 글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의 글에는 인간사의 어찌할 바 없는 지저분함에 대한 이해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지리한 삶에 대한 공감이 없다. 인간의 품격은 그런 지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의해 그 모양새가 종종 뚜렷히 드러나곤 한다.  


 <월든>에는 소로우가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세상의 짐이 없다. 수도승들이 의도적으로 그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고립된 한 존재로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양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부모, 자식을 비롯한 관계의 무게나 정치적 상황에 따른 시민적 의무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소로우에게 그 고민이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 그는  <시민 불복종>에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도 하니까.  


그러나, 소로우의 글이 왜 그토록 칭송받는지, 왜 법정스님이 그토록 <월든>을 아끼셨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 것 같다. 그의 글은 독립된 개체로 스스로를 고립시켜 개인이 이 세상과 정면으로 만나 무엇이 최선인지를 탐색하기 위해 분투했던 흔적이다. 숲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28살이었다. 그 나이를 감안하고 바라보면, 책은 여전히 빛난다.


- 지금 남부와 북부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고 눈을 번뜩이는 악랄한 노예 주인들이 수없이 많다. 남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 감독일 때이다.


- ‘노인 양반! 당신은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명예도 얻었소. 그리하여 당신은 스스로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말라는, 어떤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있소. 새로운 세대는 마치 난파된 배를 버리듯이 지나간 세대가 벌여놓은 사업을 버리는 법이라오.’


- 집을 마련하고 나서 농부는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실은 더 가난하게 되었는지 모르며, 그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 나는 집주인이 누리고 있는 이른바 유복하고 세련된 생활이라는 것이 껑충 뛰어서 잡은 것임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고, 나의 모든 관심은 그 ‘껑충 뜀’에 쏠려 있어 그의 생활을 장식하고 있는 미술품을 감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 내게 결점과 모순이 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내 말의 진실성에 영향이 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내게는 큰소리치는 기질과 위선적인 면이 다소 있지만(사실 바로 이런 면이 나의 ‘쌀’에서 가려내기 힘든 나의 ‘겨’에 해당되며, 이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만큼이나 아쉬워하는데) 이 점에서만큼은 자유롭게 숨 쉬고 사지를 펴보고 싶다.


- 우리의 발명품들은 흔히 진지한 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예쁘장한 장난감일 경우가 많다. 그것들은 ‘개선되지 않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개선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목적이란 기차가 보스턴이나 뉴욕에 쉽게 도착하듯이 이 신발명품 없이도 너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이다.


- 우리의 높은 탑과 기념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그전에 우리 마을에 한 미치광이가 있어 땅에 구멍을 파서 중국에 도달하려고 했는데, 그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중국의 솥과 냄비 소리가 들리는 데까지 파내려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파놓은 구멍을 구경하러 일부러 가볼 생각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동서양의 기념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누가 세웠는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시대에 그런 것을 세우지 않은 사람, 즉 그런 사소한 것을 초월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하는 것이다.


-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으며,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 나는 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엄격하게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수풀을 폭 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압축시켜서 그 결과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며,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번의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 만약 당신이 공중에 누각을 쌓았더라도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누각은 원래 공중에 있어야 하니까. 이제 그 밑에 토대만 쌓으면 된다.


- 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수준을 가장 둔한 통찰력에 내려맞추고는 그것을 상식이라고 찬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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