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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Dec 30. 2019

[기고후기] '오줌권'을 향한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시사인 연재글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573



1.

이번 글을 쓰면서 특히 새로웠던 것은 플로린스 케네디라는 흑인 여성 변호사의 존재였다. 1970년대에 흑인 여성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걸었던 놀라운 사람이었다. 공부를 하다가 그녀가 주도적으로 진행한 “1973년 하버드 소변 투쟁”이라는 사건을 발견했고, 하버드의 잡지인 크림슨에서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쌀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피켓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쌀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To pee or not to pee, that is the question).” 1973년 어느 날 하버드 대학 로웰홀 앞으로 이러한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여성들이 모였습니다. 흑인 여성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플로린스 케네디가 건물 계단 위에서 짧은 연설을 마치자 그 자리에 있던 하버드 대학 여학생들이 손에 든 유리병 속 내용물을 계단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소변처럼 보이는 노란색 물이었습니다. 훗날 ‘1973 하버드 소변 투쟁(The Harvard Pee-In of 1973)’이라고 불리게 된 이 사건은 한 여학생이 플로린스 케네디에게 전화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글을 쓰며 실제 이 사건이 있었던 하버드 대학 로웰홀을 찾아가 사진을 찍었는데 생각보다 계단이 작고 ‘볼품없어’ 시사인에는 실리지 못했다.

2.
화장실을 두고 긴 글을 구상하기로 했던 건 3가지 경험 때문이었다. 첫째는 화장품 판매직 연구를 하면서 ‘고객용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노동자’에 대해 알게 된 것, 둘째는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하면서 공중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현실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올해 5월 중순 진행된 <모두를 위한 화장실, 어떻게 만들까> 토론회 자료집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자료집에 실린 타리, 루인, 박한희 변호사의 글은 큰 도움이 되었다.

3.
이번 글은 마지막 세 문단을 보다 생생하게, 기시감을 느끼지 않도록 전달하는 게 중요했다. 그 핵심에는 김원영 변호사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언급했던 오줌권이 있었다. 배설권, 생리현상 해결 같은 문구가 아니라 ‘오줌권’이라는 좋은 구절이 있었기에, 그 구체적인 문구를 어떻게 보편적으로 확장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고, 그러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답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질문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공통점을 묻는 것이라면, 인간은 배설하는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있는 한 대변과 소변을 보지 않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장애학 연구자이자 인권변호사인 김원영 씨는 미리 눌 수도, 조금씩 나눠 눌 수도 없기에 “모든 권리 가운데 ‘오줌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 아니겠느냐고 되묻습니다(<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2018, 사계절).>>

4.
‘평등한 여성 화장실’을 이야기하면서, 평등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간접적으로 공유하고 싶었다. 여성이 공공장소에서는 실제로 화장실을 가는 게 불가능했던 시절부터 오늘날까지의 변화는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했다. 무엇이 동등할 때, 우리는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우 적합한 사례였다.

화장실의 존재여부-> 면적 -> 변기수 -> 대기시간으로 바뀌는 측정 기준의 변화는 상징적이었으니까.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의 공공장소에 설치된 화장실은 모두 ‘실제로는’ 남성 전용이었습니다. 남녀 공용이라 해도 여성에 대한 아무런 배려가 없는 화장실을 여성들이 이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여성용 공중화장실이 과도하고 사치스러운 시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성용 공중화장실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권력자들은 공공장소에 여성 화장실이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존재 여부만으로 평등을 따진 셈입니다.

이후 남성 화장실보다 훨씬 더 작은 크기로 만들어진 여성 화장실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자, 남녀 화장실 면적을 동일하게 디자인하는 관행이 생겼습니다. 이는 남녀 신체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면적이 동일할 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변기 수가 남성 화장실에 비해 여성 화장실에 더 적었습니다. 동일하게 해야 할 것은 면적이 아니라 변기 수라는 주장이 나온 이유입니다.

이것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연구마다 측정값이 다르긴 하지만 기존 연구들은 일관되게 여성의 화장실 평균 이용 시간이 남성의 2배가 넘는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화장실은 종종 생리대를 교체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몸과 경험의 차이를 감안해 남녀가 화장실을 평등하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려면, 그 평등을 측정하는 척도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습니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며 화장실의 존재 여부, 면적, 변기 수를 따져 마침내 도달한 결론은 남성과 여성이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5.
하버드의 남학생들이 그동안 여학생이 없었으니까 대학에 여성 화장실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때, 플로린스 케네디가 그 발언은 대학에서 비서로, 직원으로 일했던 수많은 여성들을 이름 없는/얼굴 없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라고 통쾌하게 반격했던 내용을, 그대로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접근성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용을 이어서 하나의 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경향신문 기자분들이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의 추모 포스트잇을 모아 출판한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2016, 나무연필)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등장합니다. “오늘도 억지로 ‘남장’을 해서 살아남았다(당신을 기억하는 트랜스 ‘여성’이).”>>

6.
기사 속에 등장하는 화장실 표지판은 모두 내가 미국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이 글을 준비하며 어디를 가건 그곳의 화장실이 어떻게 표시되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 과정은 마지막 문단의 첫 두 문장을 계속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화장실은 그 사회의 권력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동시에 화장실에 새로운 질서와 원칙을 구현하는 것은 그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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