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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Dec 30. 2019

[기고후기] 2019년 대한민국 '고롱고사'는 어디인가

시사인 연재글

https://bit.ly/326dm2y



1.


진화를, 그러니까 자연선택에 따른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ESC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그 전까지도 진화에 관심은 있었지만, ESC 활동을 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과학자들이 다윈과 진화라는 단어를 두고서 보이는 감탄과 경외감을 보면서, 이건 내가 꼭 알아야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기 되었기 때문이다.



2.


글을 구상한 것은 12개월 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모잠비크의 고롱고사 지역의 아프리카 코끼리가 상아가 없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였다. 좀 더 배경을 알아보니, 모잠비크의 내전은 6.25 한국전쟁처럼 냉전의 대리전이기도 했다. 한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이, 또 다른 쪽은 구소련과 중국 등이 계속해서 물자를 퍼붓었기에 10년이 넘게 전쟁이 계속된 것이었다.

암컷 코끼리의 상아가 사라지게 된 것은 대규모 밀렵에 의한 생존경쟁 때문이겠지만, 그 밀렵의 원인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에 따른 냉전이었다. 그렇다면, 코끼리 몸의 진화가 생겨나게 된 '원인의 원인'이 냉전과 전쟁이라면, 사회역학자로서 인간의 몸이 사회적 환경이 미치는 진화의 힘에 대해 말하기에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고, 역사적 사실이겠구나. 이걸로 시작하자.

3.
내셔널지오그래픽 기사는 충실하게 조사를 해서 숫자를 적었고 고롱고사 지역에서 오랫동안 코끼리를 조사하던 연구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이 내용으로 논문을 쓴 게 있다면 그걸 인용했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논문이 있었는데, 이 논문을 인용할 경우에는 고롱고사의 상아 없는 코끼리가 가지고 있는 ‘원인의 원인’에 대한 함의를 연결시켜낼 수가 없었다.

4.
고롱고사 코끼리의 상아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어떻게 2019년 한국사회 생존경쟁으로 넘어오느냐인데, 그 연결고리는 당연히 진화였다. 인간 몸에 남겨진 진화의 흔적은 정말 여러 가지 논문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과학적으로 튼튼하면서도 대중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두 개의 주제가 피부색과 겸상적혈구빈혈이었다.

5.
피부색과 진화에서 거주하는 위도에 따라 흡수하게 되는 자외선의 양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Vitamin D의 흡수량이 달라지는 데 이게 위도별로 인간 피부색(멜라닌 색소의 양)의 차이를 만들어낸 진화의 힘이라는 데는 학계가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자외선이 부족해서 구루병에 걸려 골반뼈가 변형된 산모는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사망할 확률도 높았고, 원시사회에서 뼈가 쉽게 골절된다는 사실은 생존 가능성을 크게 낮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자외선의 양을 너무 많이 받았을 때, 피부암의 걸려 죽을 수 있다는 가설은 진화의 동력으로서 학계가 아직도 논쟁 중인 주제였다. 일단 피부암의 유병율이 그리 높지 않을 수 있었고, 또 피부암은 아이를 낳고 난 20세 이후에 걸릴 가능성이 높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 논쟁에서 피부암의 위험을 진화의 동력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적도 지역에서 자외선의 양이 어마어마할 때 피부암의 위험이 위도가 높은 지역과 비교하기 어렵다는 가설을 내놓았고, 이런 가설 지지하면서 피부색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를 Science지가 크게 조명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합리성이 있는 가설이라고 생각했지만 글에서는 피부암을 작게 언급하고 Vitamin D를 주로 언급하는 방식으로 기술했다.

6.
공부하면서 글 쓰기가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겸상적혈구 파트였다. 나는 가능한 대립유전자 중 하나만 변형된 겸상적혈구 형질이라는 용어를 내 글에 끌어들이지 않고 글을 쓰고 싶었다. 많은 독자들에게 그 파트에서 호흡이 한번 끊길 수 있으니까.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겸상적혈구 빈혈로는 글을 합당하게 서술하기가 힘들었다.

겸상적혈구빈혈과 말라리아의 연관성이 오늘날 학술지로서 주목받은 계기는 2011년 사이언스(Science)지에 겸상적혈구 형질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말라리아에 감염되면 어떻게 적혈구의 모양이 무너져 내리는 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페북에서 댓글로 도와주신 여러 분들의 의견에 따르면 겸상적혈구 빈혈 자체는 그 악영향이 너무 심해 어린 시절에 사망하는지라 말라리아로 인해 사망하지 않게 되는 보호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연구들을 찾아 읽으며 겸상적혈구 형질 글을 마무리하려다가, 각 지역별 겸상적혈구 형질의 유병률을 언급할 수 있으면 보다 이해가 빠르겠다 싶어 논문을 검색했는데, 다행히도 2018년도에 기존 논문 5개를 모아 정리해 유럽과 아프리카의 겸상적혈구 형질 유병률을 비교한 논문을 글 수정 막판에 발견해서 추가했다.

7.
그렇다면, 이제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의 몸에 대한 진화의 흔적에서 2019년 한국사회로 돌아오는 매개체가 필요했는데, 피부색과 겸상적혈구 형질로는 그게 불가능했기에, 계속 찾다가 야간 노동으로 들어갔다. 야간 노동이 발암물질(probable carcinogen)으로 확정된 것은 10년이 넘어서 너무 오래된 이야기를 하게 될까 걱정했는데, 마침 2019년 7월에 WHO에서 다시 회의가 열려 야간 노동이 발암물질이라는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그걸 Lancet Oncology에 발표했던 논문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 사례를 사용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피부색이나 겸상적혈구 형질과 달리, 야간노동은 진화를 통해 습득한 인간 몸과 20세기 급격히 변화한 노동환경 사이의 충돌로 글을 쓰며, 마지막 5문단으로 올 수 있었다.

8.
마지막 5 문단은 사회 역학자인 내가 진화에 대해 기고하는 이유였기도 했고 오늘날 우리가 지금 여기 문제를 바라보는데 진화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서술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중요했다. 수십 번을 고쳐 썼다.

문제는 ‘자연선택을 위한 생존경쟁’이라는 다윈이 발견한 진화의 메커니즘이 2019년 한국사회의 생존경쟁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게 다르다는 건, 막연하게 짐작이 되는데 그 다름을 어떤 언어로 적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과학교사인 안주현 선생님께 초고를 보내드리고 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본인에게 왜 초고의 마지막 5 문단이 어색하게 느껴졌는지를 그림으로 그려서 보내주셨다. 그 그림을 두고서 대화를 나누며 수정했다. 그제야 그 막연함이 뾰쪽한 언어로 표현이 되었다.

그 핵심은 2019년 한국인의 삶은 분명 진화의 과정이 되는 일부분일 텐데, 오늘날의 생존경쟁은 왜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이 적용되기 어려운지를 명확히 하면서 글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9.
글을 쓰는 과정에서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많이 배웠다. 관련해서 댓글로 의견을 주셨던 여러 페친분들과 미리 읽고 글을 검토해주셨던 김준, 안주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물론 당연히 최종 글의 내용은 내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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