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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Apr 19. 2020

[시읽기]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지표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건목(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 <소나무에 대한 예배> (황지우)-


자연은 어떠한 인간적 의도도 없이 존재한다. 지진은 바이러스는 어떤 윤리적 교훈을 나누기 위해 인간을 찾아오지 않는다. 그 무의미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다.


시인은 소나무에 용서란 무엇인지 묻는다. 강자만이 용서도 할 수 있다는 세상에서 시혜의 용서가 아닌 다른 무엇을 보았기 때문이다. 타인은, 너의 존재는 내 삶의 우아함을 품격을 무너뜨린다. 가장 쉬운 방법은 너를 세상에서 지우는 일이고, 그게 어렵다면 너를 포기하면 된다. 타자는 인지를 통해서만 내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기에, 그 두 결정은 윤리적으로 같다. 내 품격을 지키는 일이 너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니까.


소나무는 구부러지고 휘어져 있다. 그렇게 자신을 온통 뒤덮은 눈의 무게를 견디어 내고 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너를 포기 하지 않은 시간이 남긴 상흔이다.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시의 세계 밖으로 나오면 소나무가 휘어진 것은 뒤집어쓴 눈발 때문이 아니다. 소나무는 눈이 내리기 전부터 휘어져 있었고 그 눈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곧 녹아 사라질 것이다.


시는 무엇인가. 왜 이 11줄짜리 글은 20년이 가까이 머릿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가.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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