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vs. 죄책감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당연히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그 왜 있지 않나. 강부자, 김혜자, 고두심 선생님 같은, 따뜻하고 온화하며 자식이 제일 먼저인 엄마. 아이를 낳기만 하면 다 그런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난 아니었다. 하자 있는 엄마였다.
아이가 예쁠 줄 알았다. 아니, 예뻤다. 정말 사랑스러웠다. 아니, 사랑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상투적이지만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이런 느낌이구나 했다. 주사 맞는 것만 봐도, 어쩌다 생채기가 생겨도 내 몸이 저릿저릿 움찔움찔한걸 보니 이 아이는 내 분신이구나 했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고, 세상 말간 표정으로 나를 보는 아이를 품에 안은 경험은, 태어나 내가 겪은 모든 경험을 통틀어 제일 경이로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가 생각하던 그런 엄마는 아니라고 느껴졌다.
아이는 예뻤지만, 우는 아이가 힘들었다.
아이는 사랑스러웠지만, 둘만 남겨진 시간이 버거웠다.
아이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둘이 하는 외출이 무서웠다.
아이가 자다가 꿈틀 하는 순간, 신경이 곤두서며 불안해졌다.
아이의 모든 순간에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모성애가 없나 봐. 내가 엄마 될 자격이 있을까. 나는 이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인터넷에 보이는 육아가 힘들다는 모든 글은 내 얘기인 줄 알았다. 답답하고 힘든 시간들이 영영 계속될 것만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육아가 힘든 내 모습이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이 죄책감의 정체를 알지 못해, 떨쳐내지 못해 힘들었다. 10년 전, 나는 모성애 때문에 불안했고 죄책감으로 힘들었다. 그런 채로 엄마가 되어 갔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아이랑은 제법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는 그럴듯한 엄마가 되었다. 둘이 놀이공원에 가서 문 닫을 때까지 놀기도 하고, 둘이서만 여름휴가도 떠났었다. 요트도 타고, 수영하고 모래놀이도 하고, 대게도 먹고 컵라면도 먹고, 끝말잇기도 하고 청개구리 가위바위보도 한다. 가끔은 학원 앞에서 기다리다 저녁 데이트를 청하기도 하고, 12세 관람가 영화를 보러 가서 팝콘도 같이 먹는다. 나 홀로 집에, 프린세스 다이어리 같은 옛날 영화를 같이 보며 깔깔대기도 한다. 그러는 내내 우린 서로 "엄마가 너무 좋아" "난 네가 왜 이렇게 좋지?" "엄마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엄마를 더 좋아해" "에이, 말도 안 돼, 세상에 엄마가 자식을 좋아하는 것보다 엄마를 더 좋아하는 자식은 없어"라고 얘기한다. 옆에서 누가 그러겠지. 꼴값들을 한다고.
매일이 아름다울 수 없으니 회사는 바빠 죽겠고 남편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집구석은 난장판인데 나서서 치우는 사람 하나 없고, 아이까지 말을 안 들을 때는 딱 미치겠다 싶게 힘들기도 하다. 아직도 이렇게 힘드네 할 때도 있지만, 육아 인생 10년이 지나며 나를 위해 적당히 OFF 하는 비법을 터득했다. 나의 10년 전처럼 육아에 허덕이고 있을 엄마 동지들에게 나만의 육아 OFF 방법으로 자그마한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여 오픈해본다.
모성애를 재단하지 말기.
엄마는 이래야 한다 라는 따위의 말 가볍게 무시하기. 내 육아는 내 방식대로. 내 아이는 내가 키울 거니까. 이상적인 엄마상에 부족한 모습을 탓하지 말고, 힘들면 힘든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대로 내 감정 인정하기. 모성애가 없다고 죄책감 갖지 말기. 당연하지 않나?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데 힘들고 어렵고 불안한 게. 못하는 게 당연하다. 엄마 잘못이 아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내가 화장실이 급해 죽겠는데, 아이 기저귀 가는 마음이 행복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비행기에서도 산소마스크는 엄마 먼저 쓰라 했다. 내가 먼저다. 내 감정이 중요하다. 내 감정이 평온해야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도, 아이에게 하는 말도 따듯할 게다. 아이가 백일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화장실이 급했고, 아이는 안아달라 보챘다. 보채는 아이를 아기띠에 안고 볼일을 보면서 나 지금 도대체 뭐 하고 있나 했다. 미칠 것 같았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컸던 어느 날, 갑자기 그날이 생각났다. 아마도 직장 동료의 둘째 임신을 축하하던 대화 중간이었을게다. 나에게 둘째가 있었다면, 그때의 나는 '너는 좀 울어라, 엄마도 화장실 좀 가자' 라며 편하게 볼일을 봤을 테다. 아이는 좀 울어도 괜찮다. 열이 40도가 넘게 펄펄 끓어 넘어가는 게 아니라면. 기저귀 좀 축축할 수 있고, 배도 좀 고플 수 있지.
그렇다면 스스로 행복해지기.
각자만의 방식으로 숨 쉴 구멍을 만들기. 성향에 따라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건, 혼자 영화를 보건, 드라마 정주행을 하건, 음악을 크게 틀고 드라이브를 하건 다 좋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 늘어지게 자도 좋고, 아이 없이 짧은 여행도 좋고, 야식과 맥주 한 잔도 나쁘지 않지.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시간이 필요하다. 남편 뒀다 국 끓여먹지 말고 나 행복하는 데 사용하자. 평소에 남편은 회사에서 수다도 떨고, 멍도 때리며 편하게 밥도 먹는다.
10년 전, 나는 자발적으로 3개월의 육아 휴직을 썼다. 3개월의 짧디 짧은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하는 나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1년 남은 육아 휴직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육아휴직을 빙자한 나의 안식년으로 사용했다. 브라보.)
출근해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어른들과 나누는 어른의 대화, 아이가 깰까 불안한 마음 없이 마시는 커피, 그냥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
이게 뭐라고.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