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학습 날이 싫은 아이의 고백
"자, 이번 학기 우리 반 반장은 OOO이다. 모두 박수."
"이번 달 시험 일등은 OOO이다."
"내일 장학사님 오시니까 국어시간 책 읽기 발표는 OOO이 하도록 하자."
1990년대, 초등학생들은 시험도 보고, 등수도 매겨졌다. 촌지도 흔했다. 선생님들의 모범생 편력도 강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선생님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내가 겪은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랬다.)
그렇다. OOO은 바로 나다. 시쳇말로 착하고 말 잘 듣는, 주입식 교육제도에서 공부 잘하는 모범생.
Z세대의 모범생과는 사뭇 다를지 모를, 그 시절의 모범생이었던 나는 나름의 성공체험을 착실하게 쌓아 왔다. (초등학교 까지는) 별 다른 노력 없이도 나오던 성적, 타고난 FM 성정 탓에 부모님, 선생님 말씀이라면 곧이듣는 바른 태도를 밑거름 삼아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 부반장 같은 학급의 임원을 도맡아 했으며, 상장도 수없이 받았다. 어른들한테 똘똘하다, 영리하다 라는 말을 듣는 게 익숙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뻔뻔하게 얘기해보자면 나는 예쁘기까지 했다. (물론 과거형이지만, 예쁘기까지 했으니 어른들이 얼마나 더 예뻐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 당시 모범생들은 발표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참관수업에도, 장학사가 와도 발표를 시키니까. 평생을 돌이켜 봐도 임팩트 있게 보고를 잘하거나, 달변가이거나 하는 축에 들지 않는 나지만, 적어도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자의이든 타의이든) 들고, 발표하는” 행위가 어렵다거나 어떤 종류의 도전 의식이 있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교실 뒤에 엄마들이 가득하다. 요즘과 달리 아빠들은 없었으며 한 반의 학생수가 4~50명이 넘던 시절이니 말 그대로 엄마들이 그득 이었다. 선생님은 다른 날보다 공을 들여 수업했고, 자신의 교육 성과를 뽐내려는 듯 제법 어려운 질문도 했다. 몇 명이 손을 들었는지, 어떤 질문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자연스레 손을 들었고 미소와 함께 불려진 내 이름. 도도하게 일어나 답을 얘기하고 앉으면서 교실 뒤편 그득한 엄마들의 눈길을 느꼈다. 나의 엄마의 기분은 나보다 더 좋았으리라.
실제 나의 엄마가 우쭐한 기분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30년이 지난 지금, 30년 전의 나와는 완벽하게 다른 내 아이를 보면서 그때 나의 엄마는 내 덕분에 어깨에 뽕 좀 들어갔겠구나 하는 부러움이 느껴졌다. 솔직하게는, 30년 전의 엄마가 더럽게 부러웠다. 발표도 잘하는 똑 부러진 반장 딸이 있던 엄마가.
1학년 참관 학습이 한창인 교실. 다른 아이들이 10개의 질문에 10번 다 손을 번쩍번쩍 들다 못해 엉덩이까지 들썩이던 1학년 교실에서 우리 아이만 차분했다. 나의 뜨거운 눈빛이 뒤통수에 느껴졌을까, 10번의 질 문 중 한 번은 손을 들더라. 평소에도 나서서 발표를 하지 않던 탓이었을까. 선생님은 반색하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고, 기어들어가는 개미 목소리도 아닌, 개미 똥구멍만 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더랬다. 극한직업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 감사하게도 적절한 호들갑과 함께 아이의 대답을 칭찬해주셨고, 아이의 뒤통수에도 미소가 그려지는 듯했다.
코로나로 멈췄던 일상이 돌아오며 찾아온 참관 수업. 4학년의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여 설렜던 내 기분과 달리, 아이는 노골적으로 참관 날이 싫다고 했다.
“참관 수업 진짜 싫어.” (공산당이 싫어요도 아니고 참관수업이 싫을 이유가 뭔데 도대체.)
“왜?”
“참관 수업하고 나면 엄마가 또 손 안 든다고, 발표 안 한다고 뭐라고 할 거잖아.”
아차 싶었다. 발표 좀 하지, 왜 손도 안 들어, 흘리듯이 한 말이었는데 마음에 남았나 보다. 아기일 때부터 낯가림도 심하고 천성이 샤이했던 아이에게는 힘든 일이었나 보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발표하기 싫어?”
“엄마들도 많고 부끄러워서 싫어. 발표 안 한다고 모르는 건 아니야.”
“발표하라고 안 할게. 손 안 든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게. 대신 엄마 보면 웃으면서 손 흔들어줘.”
“알았어.” (안도감의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손을 들지 않을까,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을까 내심 기대하였지만, 이변은 없었다. 우리 아이 포함해서 비슷한 몇 명의 아이들을 빼고 20여 명의 아이들이 10초에 한 번씩 손을 들고 발표를 하는 모습만 보고 왔다. 아직 좋은 엄마 되려면 한참 멀었나 보다. 발표 잘하던 누구누구의 엄마가 그리 부러웠으니 말이다. 아이에겐 호기롭게 엄마 보면 웃으며 인사해달라고 세상 쿨한 엄마인 척했지만, 속으로는 미련 뚝뚝 질척대고 있었다. 얼굴엔 네가 발표 안 해도 괜찮아 라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채 말이다.
며칠 뒤, 상무님과 연말 성과 면담이 있었다. 18년 간의 사회생활에서 수많은 리더를 만났지만 손에 꼽을 수 있는 좋은 리더가 되어 주신 상무님, 성과에 대한 평가나 과오에 대한 질책보다는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한 덕목과 마음 가짐에 대해서 자분자분 얘기해주셨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말들을 남기며 (to myself,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아이를 탓했던 모든 부모들에게) 다시 한번 진짜 엄마가 되어보자고 다짐한다.
"리더십이란 게 참 어렵지. 누가 잘 가르쳐 주지도 않거든, 가르쳐 준다고 해도 이론과 현실은 딴판이야. 좋은 리더라는 게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너는 너의 장점이 뭔지 고민하고 그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너의 리더십 색깔을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단점을 채우고 평균을 끌어올리려고 하지 마. 단점을 채우는 것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이니까. 평균적으로 잘한다는 건 특출 난 장점이 없다는 반증이야. 나는 학교 다닐 때 양현석보다 공부는 다 잘했지만 모든 과목이 전국 탑은 아니었지. 양현석은 공부는 안 했어도 춤에 있어서 만큼은 탑이었던 거고. 평균적으로는 내가 나은 학창 시절을 보냈을지 몰라도, 그래서 나는 상무하고, 양현석은 오너인 거아. 물론 지금은 오너가 아니어도 재산은 나보다 훨씬 많지. 하하."
40대 후배에게 단점을 극복하기보다 너의 장점을 살리라는 묵직한 조언. 그 얘기를 곱씹으며 아이 얼굴을 떠올렸다. 직장 상사도 아니고 엄마인데, 누구보다 아이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어야 하는 엄마인데 고작 발표 하나에 속상해했고 아이 마음에도 생채기를 내고 말았다.
발표는 싫어하지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예의가 바르며 책임감이 강한 아이다.
반장으로 나서는 건 싫어하지만, 친구들을 배려하고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며 어려운 친구에게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심성이 고운 아이다.
아이의 단점에 인색한 마음을 내보이지 말고, 아이의 장점에 반색할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겠다.
아이를 키우며 이렇게 한 걸음씩 엄마로서 같이 커가면 되지 않을까. 발맞추어 걷다 보면 언젠간 애써 맞추지 않아도 우리 둘 바라보는 곳도 같고, 보폭을 맞추며 손잡고 웃음 짓는 날이 오겠지.
"다 그 아이를 위한다고 한 일인데 아직도 엄마란 자리가 제겐 너무 어렵습니다."
"나 또한 그 자리가 제일 어렵네. 그러니 부모는 앞서 걷는 이가 아니라 먼저 가 본 길을 알려주는 이라 하지 않던가. 그럼 적어도 자식이 위험한 길로는 가지 않게 해야지. 이제 정신이 돌아왔으면 지금부터 자네가 어미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생각해보게."
"계영배라는 것이다. 잔에 술을 7할 이하로 따랐을 때는 술이 하나도 새지 않지만 7할 이상을 따르는 순간 새어나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아. 어쩌면 계영배처럼 작은 구멍이 뚫려있을지도 모르지. 사실 국모인 나도 구멍이 숭숭 나있다. 스스로 만족한다면 꽉 채우지 않아도 썩 잘 사는 것이다."
- 드라마 슈룹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