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잘하는 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잘 해내는 타인이 부러웠다. 그러다 좋아하는 것이 생겼고, 그것이 꿈이 되었다. 대범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소심한 덕에 힘든 때에 내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 박자, 한 박자 때로는 엇박자 같아도 인생의 리듬이란 게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아졌다. 돌아보면 이 모든 건 누군가의 ‘버티기’ 덕분이었고, 이야길 나눈 덕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마음이 약하거나 우울감을 쉽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산다는 건 주변인들이 스스로 이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걸 지켜보는 아픔이거나 스스로 이를 경험하게 되는 슬픔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절망을 겪어내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살다 보면 이런 부정적인 경험과 감정이 꼭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를 견뎌내다 보면 이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도 찾아온다. 물론, 지나간 다음에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지만…. 때로는 문학으로부터 이러한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다. 다음의 문장들 덕분이었다.
사춘기 시절, 나는 뚱뚱하고 우울한 소녀였다. 뚱뚱하다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싫어서 자주 구석진 곳에 숨어 있었다. 숨어 있다고 한들 뚱뚱한 나를 다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숨길 수가 없어서 어디에 갔다가 누가 뚱보라고 놀리면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면 그렇게 싫었다, 세상이 나를 부르는 소리는 내 뚱뚱한 실존을 드러내라고 채근질을 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아 마음이 쓰라릴 때면 나는 또 구석에 앉아서 단팥이 들어간 빵을 집어먹었다. 더 뚱뚱해질까봐 겁이 나는데도 먹었다. 빈속에 단맛이 들어가면 슬프고 외로웠다. 나는 혼자였고 외롭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하는 실존을 가졌다.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
언제쯤 이 문장을 읽게 됐을까. 오래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만약 기쁨으로 충만했던 시기였다면 지나칠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발견한 순간. 터널을 먼저 건넌 이가 남긴 이야기 덕에 외로워서 혹은 쓸쓸해서 가능해지는 것들도 있다는 걸 확인한 날이었다. 행복하기만 했다면 타인에게 위로를 건넬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문학이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삶이 한가지 빛깔로만 정의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계속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도 반드시 교훈은 있다. 지나고 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부정적인 경험이 꼭 나쁘지 않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나왔기 때문에 결국, 이겨낸 덕분인지 모른다. 아니면 이겨내기 위해 인간이 오래도록 외우던 주문 같은 것인지도. 그래서 아픔을 어떻게 견뎌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충분히 아파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준이와 앞으로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도 이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것이 삶이라고 그래서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문장을 보고 싶었다.
성인이 되고 성공보다 실패를 말하는 이들에게 마음이 갔다. 실패를 말하는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때 타인을 바라보게 되었고, 때때로 먼저 손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버팀목이었다.
선생님은 도시락 반찬으로 아이들 집안의 빈부가 가늠질되는 게 보기 좋지 않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밥하고 가져온 반찬하고 큰 양동이에 부어 같이 비벼 먹자.” 모두 도시락을 내어놓았고 가지고 온 반찬도 함께 양동이에 부었다. 비벼서 서로 나누어 먹었다. 비빔밥을 먹다보면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굶는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 다섯 개를 가져오셔서는 양동이에 붓던 처녀 선생님.
고등학생 시절 수업 시작 전에 호명된 적이 있었다. 흔치 않은 일이라 의아했는데, 처음 듣는 칭찬의 이유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한 선생님께서 칠판을 깨끗이 지웠다고 긴 시간 칭찬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칠 수 있는 일이었다. 항상 같은 방식으로 지운 칠판이었으니까. 타인의 슬픔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 칭찬 거리를 모른 척하지 않는 사람. 작은 것도 그냥 넘기지 않는 사람. 모두 같지 않을까. 자신의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았던 사람인지 모른다.
쉽게 읽을 수 있을 뿐 쉬이 실천할 수 없는 건 삶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삶은 쉽지 않다. 타인을 바라보는 건 얼마나 쉬운가. 그에 비해 견뎌내는 삶은 얼마나 고된가. 그녀의 외로움이 우울로 그치지 않았던 이유는 이를 견디어낸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그가 놓치지 않은 감정들 덕분이었다. 그는 이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던 이야기 덕분이었다고 스스로 말한다.
실패와 좌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러나 경험 전보다 나아지는 것도 분명 생길 것이다. 앞에서 말한 ‘순간’ 역시 이를 말한다. 준이만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화해내길 바란다. 진심으로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