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동아줄

비가 좀 내린다

스물네번째날(6/13)

by 하얀
P1120874.JPG 안개에 가려 범섬이 보이지 않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개 때문이었다. 숙소 창문만 열어도 늘 보이던, 흐릿하게라도 보이곤 했던 범섬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하긴 이주는 장마가 시작된 주였다. 원래 처음 접한 예보에는 2주내내 비 소식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중간중간 비는 그쳤고, 아예 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예보 또한 실시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비는 별로 오지 않았고, 천둥 번개도 치지 않았다. 그저 비가 '조금' 내리는 정도였다. 흩뿌리는 정도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주에 살 때 퍼붓듯이 내리는 비를 참 많이도 만났었는데, 그런 비는 내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대신 안개가 조금 자주 꼈다. 그래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개가 말끔히 걷힐 땐 또 얼마나 신기했는지. 풍경은 시시각각 바뀌곤 했다. 풍경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더 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일기예보만 새로고침하며 바깥 풍경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다가 하나 더 알게 된 것이 있다. 비가 그칠 때 즈음이 되면 어디선가 새들이 다시 몰려온다는 것. 새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짹짹거렸다. 조금 폭발적으로 울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비가 미스트를 뿌리듯 보슬보슬 조금씩 내리고 있는 상태인데, 조금만 지나면 신기하게 정말 비가 그치곤 했다. 참 신기한 날이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엔 보이지 않는 양상이었다. 오직 거의 종일 비가 내리는 날에만 새들이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모여들어 소리 내기 시작하는 모습이.


P1120875.JPG 그러다 금세 안개가 조금 걷히기도 했다.

풍경에만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지낼 때 가끔 대청에 앉아 더위를 피하거나 잠시 비가 내리는 것을 빤히 보긴 했어도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내 그 문들을 닫아버렸던 거 같다. 시골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 중 하나는 친척오빠와 동네 산책을 했던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 어린아이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돌며 바뀌는 풍경을 보곤 하던 기억이 난다. 몇 번 되지 않는 그 산책 중 처음으로 산딸기를 따 먹기도 했고, 그 길을 지나면 온갖 무늬를 지닌 거미들을 봤던 기억이 있다. 산딸기를 따 먹던 곳은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가장 좋아했던 곳이었고, 거미들은 주로 도로 주변을 걸으며 봤던 거 같다. 무서웠으면서도 계속 계속 봤던 거미. 그 길을 다시 걷는 일이 언젠가 다시 생길 수도 있을까.


P1120881.JPG 새들의 아지트로 추정되는 곳 중 하나.


그리고 이곳을 다시 찾는 기회도 다시 생길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이 순간이 그리워질까. 좋지 않았던 기억은 잊히고 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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