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번째날(6/12)
엄마는 집으로 먼저 돌아갔다. 어땠을까. 내가 대학생일 무렵 그러니까 십여 년 전부터 엄마는 환갑 때 해외여행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어떤 날은 진중하게, 어떤 날은 그것보다 더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환갑이던 올해. 아쉽게도 엄마는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세상에 십 년 뒤에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할 것이라고 누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4월 말 나는 퇴사를 했고, 제주에서 한달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엄마를 초대했다. 엄마는 다시 제주에 돌아왔었다. 내가 그랬듯이.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꼭 필요했던 몇몇 물건을 들고. 그것보다 더 큰 가방을 들고. 그런 엄마에게 나는 부탁했다. "짐이 너무 많은 거 같아. 내 옷을 좀 부탁해" 바리바리. 지인에게 선물로 줄 크런치 15박스까지 들고서 엄마는 제주를 떠났다. 이틀 내내 모기에 시달렸던 엄마는 이날 늦잠을 잤고, 법환포구라도 들리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대신 첫날 안개 때문에 잘 나오지 않던 바닷가에서 범섬을 배경으로 다시 사진 찍기로 했다. 사진 찍고 바로 출발.
공항에서 밥을 먹고 싶진 않았는데, 역시나 버스는 늦었고, 시간은 없었다. 할 수 없이 공항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맛있다고 했다. 꼬막비빔밥과 오징어덮밥. 그렇게 제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밥을 먹고, 다시 공항 앞 야자수 나무를 배경으로 다시 한번 사진을 찍고. 진짜로 엄마는 떠났다. 다시 집으로. 나보다 먼저.
조심조심 다녀
딸 가진 부모 마음이 다 그런 것인지 첫날 옆방에서 나오는 남자를 보고 엄마는 걱정했었다(아빠한텐 말하지 말라고 할 걸). 엄마가 가고, 조금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마지막 날 새벽에 이틀 내내 모기 때문에 못 잔 엄마가 나를 깨웠다. 나는 모기장을 치고 자자고 했지만, 엄마는 싫다고 했었다. 좁게 자는 건 싫다고(모기장 사이즈가 좀 작았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모기 찾기에 혈안이 된 엄마는 바로 옆 나를 보지 못하고 베개로 내 얼굴을 세게 쳤다. 새벽이라 나는 짜증을 냈고, 엄마도 짜증을 냈다. 결국 모기장을 치고 잠을 청했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짜증 내지 말 걸. 아마 엄마도 같은 생각을 했겠지. 여행만큼이나 관계 역시 쉽지 않다. 가족 간의 관계도. 짜증내고 싶지 않았는데. 다들 이러고 사는 걸까.
엄마가 가고 이틀 뒤 잠시 볼일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족을 만났다. 할머니와 엄마, 아들로 보이는 그들은 꽤나 다정해 보였는데, 이유는 이렇다. 열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계속해서 "엄마~"를 다정하게 부른다. 그러면 엄마만 "어~"하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까지 "응~"하고 답한다. 길이 끝날 때까지 그 가족들은 계속 그러다가 엄마는 까르르 웃으며 이제 대답 안 할래, 라고 답했다. 얼마나 정겨운 미소던지. 가족은, 부모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엄마를 믿고 있었다. 신뢰의 눈빛. 그 선한 눈빛으로 아들은 사랑스럽게 엄마를 계속 불러댔다. 사실은 나도 그런 때가 있었을 거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아니면 잠시 잊은 걸지도 모른다.
부모에게서 학대를 받다가 스스로 집을 탈출한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접하고, 기사를 통해 그 아이가 건넜다는 지붕 사진을 실제로 보고, 차마 믿을 수 없는 학대 내용을 보고, 그럼에도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는 가해자의 말을 전해 듣고 싱숭생숭하던 차에 만났던 가족이었다. 적어도 가족은, 부모는, 엄마는, 자식에게 특히 어린 자녀에게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목이 쉬어라 사랑스럽게 '엄마~'하고 외칠 수 있는 자유가 공평하게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심 없이 기대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