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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Oct 22. 2020

2시간 거리를 30분 내로 갈 수 있다면

의왕 왕송호수. 풍경을 즐길 것인가 짜릿함을 즐길 것인가

 지난 2일엔 의왕에 다녀왔다. 벌써 보름이 지난 일이다. 그 사이 날씨도 제법 많이 추워졌다. 그때만 해도 겉옷을 걸쳤다 벗었다 했었는데 어느새 밤이 되면 얇은 패딩을 입을까 말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엔 강렬했던 발가락이나 허리 등의 통증 같은 것 대신 감상 같은 것만이 자리한 느낌이다. 평소 되도록 많이 걸어야지, 하고 되뇌지만, 사실 1시간만 걸어도 발가락이 살살 아파온다. 2시간 정도 걷게 되면 기진맥진하게 되고. 그렇다. 기진맥진했던 어느 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면 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쉽지 않다. 특히 길을 모르거나, 목표 지점이나 예상 소요 시간 등을 모를 경우엔 더욱 그렇다. 왕송호수에 간 것이었으니 쉽게, 호수 한 바퀴를 돈다, 생각하면 간단하다. 하지만 간단하지 않았던 것은 호수 한 바퀴를 다 돌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걸으며, 풍경을 보고 예쁜 건 사진으로도 남겨두고, 간단한 음료나 간식 등을 즐기며 레일바이크를 탈 계획이었다. 결론적으론 모두 다 한 셈인데, '한 바퀴'를 다 돌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계속 짝꿍에게 물어댔다. "이 길(여정)은 언제 끝나" 이 질문에 짝꿍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 왔어" 그렇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흔한 대답이었다. 갈 길은 멀지만 습관적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달래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한다. "거의 다 왔어." 그렇구나. 우린 다 온 길을 한 시간도 더 넘게 걸었구나.


 지도를 보지 않고 무작정 걸었더니 처음엔 살랑살랑 불어오던 바람도 좋고, 지지배배 지적이는 새소리도 좋고, 코스모스 길도 걷는 재미를 더해주는 거 같더니 나중엔 호수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싶었다. 그렇다. 우린 입구 옆에 있는 레일바이크 타는 곳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해 그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좋은 점이 더 많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바퀴를 다 돌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곳을 지나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들이 무궁무진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방사된 채 풀숲에서 놀고 있던 닭들을 만난 것이다. 레일바이크를 타고서도 이 지점을 지나가긴 하지만 그땐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길과는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인 거 같았다. 닭들은 유유자적 바람을 즐기며,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었지만, 저 옆에 있는 모이통 쪽에 비둘기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땐 빛의 속도로 달려 그 무리들을 쫓아내고 자신의 먹이를 지켜냈다. 이렇게 큰 닭을 본 건 처음인 거 같았다. 풀어놓고 키운 덕인지 더 건강해 보였다. 물론 뛰는 것을 확인한 후 더 굳어진 생각이지만.



 온갖 새소리가 들려 나무 위를 올려다보면 막상 그 형체가 잘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참새 무리가 날았다 앉았다를 반복했는데 나무가 높고 울창해서인지 나무에 앉아버리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새소린 참 좋았다. 소리만으론 새를 구별해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아 왜가리나 백로, 오리 등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시 보니 백로는 죄다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광천에서 보던 녀석들보단 넓은 곳에 있어서인지 괜히 더 건강해 보이고 마음 놓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먹이든 친구든 더 많을 테니까. 돌아보건대 역시 앞으로, 앞으로 걷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뭔가 밥로스 아저씨라면 "참 쉽죠?"를 외치며 멋들어지게 그려낼 수 있을 거 같은 풍경이었다. 물론 다 걸은 뒤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 걷다 보니 정말 "다 왔어"란 말이 마침내 실현됐다. 수많은 날벌레떼들을 지나 도착한 길이었다. 매표소에 가기 직전부터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에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대기를 하는 동안에 제법 굵어졌던 빗방울은 레일바이크에 앉자 다시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고, 내릴 때 즈음엔 그쳤다. 기가 막히게 다행인 타이밍이었다. 매점도 보이지 않는 길 한가운데서 비를 만났다면 가장 기대했던 레일바이크를 타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목표까진 아니었지만 타볼까 했던 레일바이크를 타니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힘들지 않을까, 무섭지 않을까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가까워지는 목표지점이 아쉽기만 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한참을 걷고 나서 타는 레일바이크라서 더 신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걸었던 곳을 이내 빠르게 지나가는 기분도 묘했다. 걸어서는 2시간 정도 걸리는 길을 30분도 채 안 되게 빠르게 지나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더 좋은지 확답을 내릴 수 있을까. 풍경을 즐길 수도, 짜릿함을 만끽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천천히 조금만 여유를 갖는다면 이 두 가지를 모두 즐길 수도 있는 하루였다. 이렇게 좋은 날이 일 년 중 며칠이나 될까. 봄바람을 맞으며 걷는 호수의 길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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