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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Mar 21. 2021

코로나와 민감성 그리고 성숙도

마스크와 마이크

 제주도에 살 때였다. 공기가 좋은 제주도였지만 미세먼지 '나쁨' 혹은 '매우 나쁨' 수치를 기록했던 어느 날이었다. 그맘때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나는 잠시 하는 외출에도 마스크를 꺼내 들었다. 그런 날 길에서 마주친 한 선배는 내게 유난을 떤다고 말했다. 아직 마스크 사용이 보편적이지 않은 때였다. 사실 흔한 반응이었다.


 이제는 10년도 더 된 대학생 때 일이다. 그때는 미세먼지에 관한 정보가 지금처럼 제공되지 않던 시기였다. 당시만 해도 포털 사이트 날씨에 메인으로 뜬다거나 길 전광판에 미세먼지 농도 수치 등이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안내되지 않았다. 그런 어떤 날 동기에게 마스크를 쓴 이유에 대해 물었던 일이 있었다. 겨울이 아닌 포근했던 날 마스크를 쓰는 게 흔치 않은 시기였던 터라 어디가 아픈가 걱정돼서였다. 친구는 기관지가 약한 편인데 그날 공기가 좋지 않다고 했다. 나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불편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참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에겐 작은 차이가 어떤 이에겐 엄청난 차이가 되는 것이다.


 언제부터 공기가 나빠지고, 우리는 그걸 어느 시기부터 인지하고 조심하기 시작했을까. 체육시간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중학생 시절 황사 예보가 있으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주로 그런 날엔 교실에서 자습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도 황사 소식이 있어 야외 체육 수업이 취소되리라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그날 우리 반만 홀로 덩그러니 체육을 했던 기억이 난다. 황사가 심한 날이었지만 실기 시험까지 수업이 몇 번 안 남아있기 때문이었고, 그런 날 야외활동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두 민감한 반응을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모래바람에 하늘이 뿌얘도 그냥 넘어가자 하면 넘어갈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작년 초에는 어땠을까. 아직 겨울이던 때 코로나가 비말(침방울)로 감염된다는 말이 연일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어도 마스크 쓰는 게 의무가 아니던 그 시절 주위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가. 간헐적으로 심한 기침을 하던 나는 한 달 가까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이럴 경우 마스크를 쓰는 게 당연했다. 한 번 기침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놀라 쳐다보던 시기였으니까. 그때 같은 층 사무실에서 마스크를 쓰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심지어 그 동료는 아무 증상이 없음에도 늘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그 동료와 나의 가운데에 앉아있던 선배는 가끔씩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나에게 불편하지 않냐며 양쪽에서 마스크 끼고 있는 것을 보는 게 답답하다는 말을 했다. 다른 부서 사람들에게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게 답답해 보인다는 말을 듣곤 했고, 그럴 때마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마스크를 벗을 수 없다는 말을 변명처럼 하던 시기였다. 


 곧 잠잠해지겠지 하던 코로나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던 시기에 접어들자 이제는 불필요한 회식, 외출, 만남 등이 자제되기 시작했다. 상황에 따라 거리두기 단계가 조금씩 변하긴 했지만 그 상태 그대로 연일 버스에서는 시민의식을 강조하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 1년 동안 누군가는 자신의 행동반경을 줄여나갔다. 지난주에 만난 친구와 어제 만났던 친구 모두 그런 경우였다. 작년에 한 번, 올해에 한 번 만났던 친구들은 각각 만날 때마다 몇 달 만에 외출을 다시 시작했다는 말을, 정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는 말을 했다. 그동안 친구를 만나는 대신 화상 통화를 하며 각자 따로 또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단 말을 해준 친구도 있었다. 그 말에 나는 뜨끔했다. 그런가 하면 아직 만나지 못한 친구도 있다. 이러다 정말 못 보겠다며 너네 집이든 우리 집이든 집에서라도 보자는 말을 했지만, 집에 어린 조카가 있고, 오랜 투병을 했던 어머니가 있는 친구에게 외출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인의 방문도 누군가에겐 반갑지 않을 것이다. 같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민감도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코로나 시기 내내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리는 누군가, 단속을 피해 은밀하게 영업을 하던 술집, 그리고 위험천만한 집회를 '자유'라는 명목 하에 강행하려던 사람들. 그 속에서 누군가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고, 그런 채로 밀집하였고,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왜 자유를 침범하려 드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적절한 것일까. 코로나 사태 속에서 때때로 확인한 건 다양한 인간 군상이 펼쳐지는 이 땅에서 정말 우리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분명한 건 지금은 마이크를 들 때가 아니라 마스크를 들 때라는 것이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마이크라면 더더욱 내려놔야 할 때이다. 그런 말들은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심은 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꽃피는 봄날 나부터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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