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피해자 없는 세상을 위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옆칸에서 통화 내용이 새어나왔다.
"아, 언니. 내가 정신없어서 연락을 못해줬네. oo이 다행히 큰 수술은 안 해도 된대. 그러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마도 누군가 다친 듯했다. 아이와 한 칸에 들어갔던 젊은 엄마는 통화를 마치고 나서 아이에게 물었다.
"oo야, oo이 많이 걱정했지?"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다.
"아니, 처음에 놀란 건 맞는데, 오히려 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이의 솔직한 말에 놀랐다. 사고 상황을 아는 것도 아니고, 아이의 마음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나 아이의 심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면서도 그래도 되나 싶었던 건 오지랖 넘게도 우연히 마주친 곳에서 우연히 들려온 음성을 통해 지레짐작 그 아이의 공감 능력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식지 않는 학폭 논란의 여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근 한 팟캐스트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학생들을 만나면 학폭이 성공하는 데에 있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전한다고(내용은 이게 다였다). 학교폭력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 피해자의 고통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가해자가 받을 수 있는 불이익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처음엔 그 말이 못내 서운했다. 피해자의 입장을, 피해자가 평생 짊어질 상처에 대해 설명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에겐 이미 공감 능력이 없어 폭행과 폭언을, 멸시와 무시를 가한 것일 테니 그런 경우 최선일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고 쉽지만 효과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타인의 아픔이 아닌 자신의 불이익에 더 공감할 테니까.
왜 어렸을 때 우리가 숱하게 들었던 '너 그러다 벌 받는다' 같은 도덕적 경고는 더 이상 먹히지 않을지 모른다. 권선징악에 대해 숱하게 배웠어도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괴롭히고, 피해자가 사과를 요구하면 부정하거나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한다. 사실상 영원히 피해를 입는 건 피해자인 것만 같다. 가해자는 기억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기회가 닿는다면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을까. 피해자가 평생 받을 고통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그것도 안 된다면 단호하게 말해줘야 할 것이다.
"그게 네 앞길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니 사람 좀 괴롭히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