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지방도시 만들기(2)
대한민국의 수도권 면적은 전 국토의 11.8%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좁디좁은 땅에 전체 인구의 50.6%가 밀집해 있다. 우리는 이를 '수도권 집중'이라는 건조한 용어로 부르지만, 실상은 모든 에너지를 집어삼키고 주변부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거대한 블랙홀'에 가깝다. 일극체제(unipolarity) 면에서 OECD 26개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이 기형적 구조는 단순한 주거의 밀집을 넘어 국가적 생존을 위협하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특히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수도권으로 유입된 인구의 78.5%가 15~34세의 청년층이라는 사실은 이 블랙홀의 중력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증명한다. 청년이 떠나버린 호남권(87.8%), 대경권(77.2%), 동남권(75.3%)의 청년층의 인구감소 기여율은 소멸의 전조를 넘어선 확정된 미래를 보여준다.¹ 수도권의 극심한 고밀도 경쟁은 주거비 상승과 고용 불안을 낳고, 이는 다시 청년들의 생존 본능을 자극해 출산을 포기하게 만든다. 한국은행의 분석대로라면 수도권 밀집 때문에 지난 22년간 10,800명의 아이들이 태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적은 숫자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지금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미명 하에 ‘국가의 내일’을 제물로 바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의 뿌리는 단순히 어제의 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관통하며 1,000년 넘게 축적된 중앙집권 체제의 유산, 즉 '인지적 감옥'에서 기인한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한 경로 의존성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는 겉으로는 실력 위주의 인재 선발 시스템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지방의 모든 지적 자산과 야망을 '한양'이라는 단일 점으로 수렴시키는 거대한 '빨대 효과(Siphoning Effect)'를 발휘했다. 과거의 최종 단계인 전시(殿試)는 국왕 앞에서 치러졌고, 합격자들은 한양 관료 사회에 편입되는 것을 유일한 성공 가도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교육 거점이었던 향교와 서원은 자생적 학문의 중심지로 자리잡지 못한, 중앙 고시 패스를 위한 입시학원일 뿐이었다.
이러한 '경(京)'과 '향(鄕)'의 분리 구조는 현대의 '인서울'(in-Seoul) 신화와 학벌주의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지방의 인재가 서울로 떠나고 그 가문이 지역과의 연결 고리를 끊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지방에는 혁신과 지역 발전을 주도할 인적 자본의 씨가 마르는 수탈적 구조에 갇혔다.
이는 중세 봉건제 유산을 바탕으로 각 지역이 독립적인 궁정, 대학, 상업 중심지를 키워온 독일이나, 1,000년간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에 독립 행정 중심지인 '조카마치(城下마을)'를 건설한 일본과는 극명히 대조된다. 독일 뮌헨이 베를린보다 높은 1인당 GDP를 기록하고, 일본 오사카가 도쿄의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상업 자본의 허브(hub)로 생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역사적 자율성이라는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지방을 수동적인 통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중앙 집중적 지배 구조의 현대적 변용(變容) 속에 살고 있다.
지방 혁신 생태계의 현주소를 진단하기 위해, 대덕ㆍ포항과 판교라는 세 도시의 발전 모델의 성과와 한계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
1973년 조성된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는 한국 과학기술의 성지였으나, 공공 R&D 주도 모델의 한계로 인해 '기술의 묘지'라는 냉소 섞인 비판을 받아왔다. 시장의 수요와 괴리된 원천 기술들이 사업화 되지 못한 채 서류상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수도권에 비해 취약한 민간 자본 유입과 정주 여건이 큰 걸림돌이다. 기술창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지지부진하며, 교육 인프라에도 한계가 있어 ‘기러기 가족’(유자녀 가정의 서울 거주)이 흔하다.
포항의 경우 앵커 기업인 POSCO와 대학(POSTECH), 연구기관(RIST)이 결합된 산업 밀착형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철강 및 제조 위주의 산업 도시라는 한계가 있으며, 가족 전체의 정주 여건도 미흡하다. POSTECH 학부 졸업생의 70% 이상이 수도권이나 해외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또한 이 곳의 연구원 및 교수 대부분도 ‘기러기 가족’들이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철강 외에 다양한 산업 환경이 부족하며, 교육ㆍ의료ㆍ문화 등 정주 여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판교 테크노밸리는 한국에서 민간 참여형 도시형성 모델로 성공한 경우이다. 정부의 직접 예산보다는 입지적 이점과 창조적 인재의 밀집, 그리고 IT를 비롯한 연관산업 생태계 중재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적 자본의 질이다. 예를 들어 동남권의 경우 인구수 기준 유출 지수보다 상대임금을 고려한 인적 자본 기준 유출 지수가 훨씬 높게 나타난다(인구수 1.28배 vs 인적자본 1.65배).² 고학력·고숙련 인재일수록 수도권으로의 이동 성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판교는 이렇게 전국에서 모인 인적 자본의 질적 우위를 바탕으로 민간 주도의 유연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하향식 예산 배분 모델과 시장 논리에 따른 진화 모델의 차이는 명확하다. 판교에 이처럼 고급 IT인재와 관련 산업생태계가 몰려든 것은 서울 강남의 문화, 교육, 의료 등의 인프라 및 도시 분위기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판교가 서울의 북쪽이나 서쪽에 위치했더라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미래 첨단산업이나 고급 인재의 유치는 땅이나 돈(정부 입장에서 보조금, 세금 감면)만으로 이루어지는 사안이 아니다.
이는 지방 발전을 위해서 단순히 하드웨어를 복제할 것이 아니라, 인재가 스스로 모여들 수 있는 거주 환경 조성을 바탕으로 '시스템적 유인 체계'를 구축할 필요성이 있음을 방증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승리한 도시들은 기술(technology), 인재(talent), 포용성(tolerance)이라는 '3T'를 결합한 강력한 '자력(magnetism)'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 뮌헨의 '뮌헨 믹스(Münchner Mischung)'는 특정 산업에 의존하지 않는 다각화된 산업 포트폴리오와 강력한 산학 클러스터를 통해 외부 충격에도 견디는 복원력을 확보했다. 바이에른주는 주 정부 예산의 3분의 1을 교육에 투입하며 독자적인 '하이테크 아젠다'를 추진한다. 베를린보다 풍요롭고 안전한 뮌헨의 성취는 중앙 정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지닌 입법적·행정적 자율권의 결과물이다.
일본 후쿠오카는 '스타트업 비자'와 같은 파격적인 규제 혁신, 그리고 공항에서 도심까지 10분 만에 주파하는 '컴팩트 시티' 인프라를 통해 국내외 청년들을 유인했다. 또한 거주자의 98%가 만족하는 정주 여건은 기술 인재들이 지방을 기피하는 이유가 '인프라 부족'임을 역설한다. 후쿠오카의 핵심 정주여건은 경제적 기회, 합리적인 생활비, 뛰어난 접근성 그리고 매력적인 육아ㆍ교육환경 등이다. 이를 기반으로 국내외에서 ‘젊은 손정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미국 오스틴은 "Keep Austin Weird"라는 슬로건 아래 독특한 문화적 개성을 유지하며 실리콘밸리보다 빠른 성장을 일궈냈다. 유연한 업무 환경과 워라밸을 보장하는 문화는 인재 유지율을 85%까지 끌어올렸다.³
이들의 공통점은 중앙정부의 시혜적 지원을 기다리지 않고, 지역 스스로가 비즈니스의 설계자가 되어 민간의 영리 활동을 위한 최적의 판을 깔아주었다는 점이다.
이제 지방 발전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중앙정부의 단순 예산 지원이라는 '마중물 전략'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핵심은 민간이 마음껏 영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하는 '규제 혁신'에 있다. 현재의 포지티브 규제 체계는 신산업의 진입을 원천 봉쇄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규제 샌드박스'를 고도화해야 한다. 행정 절차의 지연이나 법령 미비가 기업의 기회비용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싱가포르와 두바이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글로벌 수준의 교육과 선진 의료 인프라를 지방 거점에 이식해야 한다. 그리 하여 고소득 전문직들이 지방에 안심하고 정주할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수도권 밖의 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도시 비전’을 제시함은 물론, 비즈니스 환경을 설계하고 최적화하는 '플랫폼 운영자'로 거듭나야 한다. "규제는 없애고 문은 열어야 한다"는 명제는 지역을 살리고 국가를 존립하도록 하는 최후의 선언이다. 각자 지역에 규모와 기능을 갖춘 권역별 거점 도시에 대형 인프라와 지식산업을 집적시켜 집적경제의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수도권이라는 단일 엔진으로 가동되는 위태로운 비행을 하고 있다. 이제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을 벗어나 근접 지역끼리 도시를 연결하여 여러 강소 도시권을 형성함으로써, 한국이 '다핵화(multi-centric) 국가'로 도약해야 한다. 너무 늦지 않게, 지난 1,000년의 ‘인지적 감옥’을 깨뜨리고 새로운 ‘지방 시대’를 열어야 한다.
(1) NBN미디어, ‘지난해 수도권 청년인구 유출, 동남권이 가장 심각’, 2022.03.29.
(2) 한국은행, ‘지역간 인구이동과 지역경제’, 2023.11.02.
(3) 인재유지율 85%는 이직률이 15%라는 의미인데, 기술경쟁이 심한 IT업계에서는 매우 낮고 안정적인 수준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