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ream window" by Georg Achen
24년 9월, 매주 일 끝나고 저녁수업을 들으며 2년 반 만에
연세대 공학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공학 석사 졸업장을 받아 든 순간 예상치 못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기쁨이나 후련함이 아니라 거대한 공허함이었습니다.
지난 10년을 돌아봅니다.
회사를 다니며 산업안전지도사, 공인노무사 자격을 준비하고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퇴사 후 사업을 시작하며 동시에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니
“이제 뭐 하지?”라는 질문만 남았습니다.
더 할 것이 없나. 이제 다 했으면 누리면 되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두 배이상 삶을 꽉 채우고 굴려왔던 "바쁨의 눈덩이"가 멈추지가 않았습니다.
삶을 계속 채찍질하며 바쁘게 살라고 그렇게 더 이상 달릴 트랙이 사라지고 결승점이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삶에서 그런 순간에는 그저 끝까지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삶의 중력 가속도를 거칠게 역행하면서 점차 삶의 속도를 줄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게 뭐였지, 그동안 내 삶에서 부족한 게 뭐였지' 미술 좋아하니까 '그림을 직업 배워서 그려볼까'
“그림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미술학원 선생님의 말 한마디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크레파스만 들고 붓을 내려놨습니다.
미술은 교과서를 외워 시험 보는 과목일 뿐,
제 손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다시 펜을 쥘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잠깐 다른 얘기지만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입시미술로 미대를 가는 아이들을 키우거나 그외는 대학 가기 위한 교양을 갖추는 것에 있는건 아닐까 싶습니다.
10대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좋아할 때 그것을 연필과 물감으로 그려가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게 해주는 그런 경험을 많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연필과 볼펜은 수능문제와 논술풀 때, 대학에서 강의노트 적을 때에만 쓰게 되었고
그것으로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법을 점점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학 때 친구의 여자 친구가 홍대 미대를 다녀서 셋이 자주 얘기를 나눌 때가 많았습니다.
입시미술 출신 서양화 전공여서 미술의 문외한인 저에게 미술을 바라보는 법, 미술시장과 아티스트 등 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넓혀 주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미술은 또 그렇게 멀어졌습니다.
SK 다닐 때 회사에 그림 동호회가 있었고, 호기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강사는 외부 전문가가 아닌 개발자출신의 직원이었습니다.
그분은 매일 출근해서 한 시간씩 드로잉을 하다 보니 어느새 비전문가이면서도 그림을 가르치고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림그리는 것도 꾸준히 그리는 하는 사람에 주어지누 선물이었습니다.
그분이 해주신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림은 잘 그리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스타일로 그리면 됩니다.”
그때 처음 생각했습니다. ‘나도 다시 그림을 시작해도 되겠구나.’
캔톤 조그만 스케치북에 연필, 색연필, 펜화도 작품으로 남겨보고팔렛과 물감도 사서 수채화도 다시 경험해 보면서 다시 만난 미술은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일과 공부로 가득 찬 10년 동안, 그림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술관 가서 그림 보는 것은 좋아했습니다. 해외여행을 가면 꼭 미술관을 들렀고, 미술 관련 신간은 거의 다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보는 것은 좋은데 그리는 것은 제 몫이 아니라고,
애써 선을 그었습니다.
24년 겨울에 접어들때 쯤 그렇게 찾아든 방황을 끝내는 것조차 내 삶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아서 생각만 하지 말고 도전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세관원이었던 앙리루소도 법학교수였던 칸딘스키도 40대에 늦게 그림을 시작해서 위대한 화가가 되었듯 그림에 대한 꿈이 있다면 늦는 것은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40대 남자들은 골프를 취미로 하지 그림 그리러 화실을 찾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엔 주저하다가 그래도 제가 하고 싶은 거라 그렇게 집 근처 화실을 찾았습니다.
이런저런 미술 프로그램과 설명을 듣는데
저는 입시 미술처럼 드로잉부터 시작하면 금방 포기할 것 같았습니다. 과감하게 물었습니다.
“유화부터 해도 될까요?”
선생님은 흔쾌히 그래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미술관에서만 보던 유화를 직접 해볼 수 있다니'. 일단 등록하고 시작했습니다.
처음 2-3주는 기본 선 긋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연필과 지우개는 어릴 때 이후로 쓴 적이 없는데 연필이 도화지를 가르는 사각거리는 소리,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 선과 선을 연결하는 면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렵던지
그렇게 사진과 실물을 보고 형태도 그려보고 그 시간 동안은 나와 그림이 하나 되는 기분입니다.
도형도 조금씩 복잡해지지만 그래도 열심히 따라 해 보고 2차원에 생명을 불어넣을 명암도 넣어봅니다.
연필과 도화지, 지우개로 나만의 그림을 만들어 갑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유화로 넘어갔습니다.
유화 물감의 질감, 붓의 터치, 캔버스 위에서 색이 섞이는 모습.
유화 전공이신 선생님께서 기초부터 차근차근 알려주셨습니다.
매주 한 번, 화실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습니다.
그림을 워낙 좋아해서 그런지 너무 쉽게 빠져들었습니다
모든 게 신기했습니다. 색을 조합하고 덧칠하며 수정하는 과정을 배워갔습니다
그렇게 4개월. 안개 낀 산, 푸른 하늘, 초록 들판. 서툴지만 제 손으로 첫 유화 작품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못다 한 다음 이야기는 수채화, 두 번째 유화 도전, 그림 그렸던 화실의 일상을 남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