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에 멋있고 잘생긴 현빈같은 남자가 어느 순간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서 내 입 주변의 우유거품을 (키스로) 닦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아직도 드라마를 보면 꺅꺅거리고 두근두근 설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믿기에는 세상이 너무 거칠다 라고 생각하게 된지도 오래다. 타인이 나를 구원하기보다는 나를 구원할 사람은 내 자신밖에는 없다고 그렇게 조금 냉소적인 척도 해보았던 적도 있다.
처음 익숙해져야 했던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소용 없어 보였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보인다. 내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좋아지는 사람은 좋아지고 나빠지는 사람은 나빠진다. 한달이 넘는 기간동안 입원하면서 나와 매일같이 인사하고 매일 한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고 내 앞에서 농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참으로 좋아졌다고 여겼던 환자가 퇴원이후 반복된 폭식과 불면으로 퀭한 눈과 띵띵 부은 얼굴로 일주일만에 응급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위로가 될지. 지금 당장 울고 싶은 것은 나인데. 이 밑도끝도 없이 나를 침잠시키는 무력감을 어떻게 떨쳐내야 하는지.
나아지는 사람들은 나에게 고맙다고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멋쩍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하였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나아진 이유는 그들에게 나아질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서, 내가 도운 부분이 있어서 나아진 것이 아니다. 그저 나아질 때가 되었으니 나아진 것이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곳에서 빈틈없이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되 사실은 전부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력감이란 시간이 흘러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스스로가 하는 행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할때 사람은 참으로 빨리 쉽게 지친다.
그래서 사실 조금 지쳐 있었고 어디엔가 징징거리고 싶었고, 누구에겐가는 네가 하는 일은 의미 있어, 잘하고 있어, 네 덕분이야 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어느 한 순간에는 그 말을 들으면 정말이지 어두컴컴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관통하듯이 구원받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그러한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역설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만큼 나는 더욱더 간절하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내 눈앞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되는 사람이고 싶어졌다. 이 어둠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눈앞을 밝아지게 만들 수 있다면. 조금더 즐겁게 미소지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 아니 그냥 밥이나 잘 먹고 잠이나 푹 잘 수 있었으면, 그렇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나였으면. 내가 할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지만,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안된다고 해도 나와 함께 걸어갈 수 있었으면.
같이 버틸 수 있다면.
다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같이 버텨나가는 것만이라도 나에게 허락될 수 있었으면.
너의 인생에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때로는 공허감과 권태가 너를 힘들게 할지라도 내 손을 놓지 않고, 잡아준다면, 그리고 내가 잡아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인간에 대해서라면, 참으로 모르겠다. 가끔씩은 정말 밉다. 어떻게 저렇게 저정도까지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지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사람이 저렇게 되기까지에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 노력해보려고 하면서도 정말 단 1g도 공감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참으로 아프고 사랑스러운 존재여서 나는 놓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