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다이어리 180901

바닷가의 설렘

by 백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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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어스름 내릴 무렵, 해변 끄트머리에 앉았다.

해변 끝 벽을 타고 오는 파도와 넓은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만나 교차되며 하나가 되어 모래 위로 부서졌다. 파도는 일정한 모양을 그리며 규칙적으로 밀려오지만 보다 보면 그 모양이 똑같지는 않다. 매 순간 바람의 방향과 속도가 조금씩 변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고 건물들은 밝아져 왔다.

늦여름의 밤바다는 조금 쌀쌀했다. 무섭게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인 탓이기도 하지만, 여름의 바다를 찾았던 여행객들이 뜸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은 반팔 차림인 사람들이 대다수인 가운데 선견지명으로 긴팔을 입은 사람들도 종종 보이는, 여름에서 가을로 한 발짝 내디딘 밤이었다. 관성적으로 얇은 반팔 티 하나를 걸친 나는 싸늘한 바람에 약간 닭살이 돋은 팔을 매만졌다.

아름답고 로맨틱한 바다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포근해졌다. 하지만 어쩐지 큰 감흥이 없었다. 아마 그곳이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바다였기 때문일 테다. 그곳이 나에게 여행지였다면 아마 더 좋았을 것이다. 바닷물에 비치는 불빛에 설레는 마음이 팔랑댔겠지.

설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봐도 봐도 감탄하는 아름다운 풍경인데도 바로 옆의 여행객들이 느끼는 감정과는 아마도 사뭇 다를 것 같다고 느꼈다. ‘역시 삶은 여행일 수 없겠지.’ 나는 다시금 새겼다.


20180901_195653.jpg 오늘 광안리 바다


삶은 며칠 밤 머물다 가는 호텔방이 아니라, 매일 밤 잠드는 내 작은 방이다. 매일 잠드는 창 밖에 절경이 있다 해도, 나는 매일 그것에 설렘을 느끼지는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설렘은 새로움 또는 유한함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삶 또한 유한하다. 하지만 똑같은 어제와 오늘, 똑같을 내일의 반복 속에서 삶의 유한함이란 마치 이역만리 타국의 뉴스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사실일 뿐이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인생이 알차 졌다는 어느 에세이의 구절처럼, 죽음을 눈앞에 맞닥트리지 않는 이상 삶의 유한함을 실감하기는 어렵다.

설레고 싶다. 나는 마음속 깊이 생각했다. 평균 수명의 반도 살지 않은 짧은 삶이지만, 그래도 30여 년을 살아오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해볼 만 한 건 해봤고, 지금까지 안 해본 것은 앞으로도 안(또는 못)할 가능성이 높으며, 새로운 것을 해본다 한들 예전처럼 설레지는 않을 거란 생각. 이 어렴풋하고도 거만한 확신은 나를 무기력으로 물들여 설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있다.

이 바다가 내가 처음 본 바다였다면, 또는 며칠 동안만 볼 수 있는 바다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벅찬 감정으로 파도를 바라보고 있겠지. 새로운 바다를 보고 싶다. 마지막 바다를 애틋한 설렘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럴 수 없다면, 늘 보는 바다에서도 매일 다른 파도의 결을 발견하며 설렐 수 있는, 솜털같이 팔랑이는 마음이라도 갖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10분을 걸어 내 작은 방으로, 어제 마신 맥주캔을 씻어 말려놓은, 며칠 전 널어놓은 빨래가 아직도 건조대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는, 그리고 내일 버려야 할 음식물 쓰레기가 냉동실 안에 잠들어 있는, 내 작은 삶으로 돌아왔다.





9월 첫날의 일기는 글일기로 대체합니다.

봐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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