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영 만화가 그려지지 않는다. 선 하나 긋고 딴짓하고 또 선 하나 긋고 딴짓하고, 이걸 반복하다 결국 펜을 내려놓는다. 오늘에야말로 뭐라도 그리겠다면서 되지도 않는 콘티를 짜다가 또 펜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이러다 또 어느 날 열심히 뭔가를 그려댈 것이다. 이제 알고 있다. 만화는 나에게 지긋지긋한 구남친 같은 존재라는 걸.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고, 떠나려고 떠나려고 해 봐도 떠나지를 못하는 존재. 아마 평생을 같이 살 것이다. 그래도 평생을 같이 살려면 좀 잘 살아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돼서 슬프다.
내가 처음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11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만화책, 만화잡지에서 출판만화를 접하고는 그것을 흉내 낸 만화를 연습장에 그려서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반응은 좋았지만 늘 1, 2회를 연재 후 무기한 휴재에 들어가곤 했다. 끈기가 없어서였다. 그렇게 만화가 좋아서 학교도 그만두고 만화학원을 다니고, 만화창작과에 들어가서 만화 그리는 걸 전문적으로 배웠다. 하지만 대학 시절부터 왠지 모를 슬럼프에 빠진 나는 졸업 후 방황하기 시작하면서 만화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디자인 회사를 다니고, 애니메이션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 만화라고는 거의 그리지 않고 살았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애니메이션 일이 만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꽤 다른 일이다. 요즘에야 만화도 분업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만화는 한 사람이 스토리를 만들고 연출을 하고 그림까지 그리는 ‘혼자’ 하는 작업이다. 애니메이션은 대체로 한 사람이 한 파트만 맡아서 하기 때문에 작품의 극히 일부만 담당하게 된다. 내가 했던 ‘동화’ 파트는 말단 파트라서 ‘그림 그리기’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파트였다.
아무튼 그렇게 5,6년을 만화를 그리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나에게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잘 다니던 애니메이션 회사에서도 권태기가 왔고, 연애에서도 권태기가 온 것이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데 때려치우기는 두렵고 속이 답답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고 혼자 속앓이를 하던 때, 갑자기 만화가 그리고 싶어 지는 것이었다. 잠들기 전 혼자 몰래 베개를 눈물로 적시다가 노트에다 콘티를 그렸다. 콘티 그리는 것조차 어색할 정도로 너무 오랜만에 그려보는 만화였다. 만화에다가 하고픈 말을 하니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 친구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렇게 만화를 다시 그리려고 노트북도 사고 <문득 생각>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을 1년 반 정도 연재했는데 나로서는 정말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내 만화의 서툰 재시작이 담겨 있다.
이렇게 만화가 그려지지 않아도 그런 믿음이 있다. 이건 돈을 벌든 안 벌든 평생 할 일이라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이왕이면 돈도 벌어다 주면 참 좋겠다고. 그러려면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지. ‘열심히’라는 게 뭔지 잘 모르는 게으름뱅이지만.
만화가 없었다면 나는 외로워 죽었을 것이라고, 언젠가 <디어 다이어리>에 그린 적이 있다. 그 말대로다. 나는 친구도 별로 없고 친구들에게 내 속 얘기를 하지도 않는다. 만나는 사람도 없다. 하루에 카톡은 0이다. 그런 나의 이야기를 만화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할 수가 있었다. 그런 통로라도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금은 그 통로를 글까지 넓혀 보려고 하는 중이라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계속 만화를 그릴 것이다. 열정까진 아니라도 뜨뜻미지근한 마음으로 계속 만화를 그릴 것이다. 우리는 평생 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