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홍시 Apr 25. 2021

잡문104 - 물 주는 날

화분들 물 주는 날을 달력에 입력해 두었더니

어제부터 물을 주라고 난리다.

그마저도 잊을까 아침부터

AI스피커가 ‘오늘의 일정’이라며 또 한 번 일러준다.


그래, 그래, 얘들아.

물 먹으러 가자.

묵직한 레몬오렌지 나무야.

집들이 선물로 받은 이름 모를 식물아.

박람회에서 우연히 만난 붉은 단풍아.

영차, 영차, 물 먹으러 가자,

세 아이들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갑니다.

얘들아 물 먹자, 하니 차례로 나란히 입 벌리고 기다리네.

아이구 착해.

물을 꼴꼴꼴.

꿀떡꿀떡 물 넘기는 소리가 난다.

그래, 그래, 많이 먹으렴.

물 다 먹으면 돌아가자.

당당히 화분받침에 앉으러 가자.

나 물 먹고 햇빛 받고

건강해질 거라고 자랑하러 가자.

그럼 기다리던 화분받침은

그래 잘했네- 하고, 있는 힘껏 받쳐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해줄 거야.


그래, 많이 먹고 많이 크자.

열매는 못 열어도 건강하자.

바람이 좀 세도 죽지만 말자.


물 다 먹은 화분들을

원래 자리로 옮기고 나는 말했다.


그림자조차 어여쁜 아이들아.

오늘은 바람이 휭휭 불지만

꺾이지 않도록 지켜줄게.

목이 마를 즈음이면 또 물을 줄게.

추운 날에는 따뜻하게 감싸줄게.

그러니 얘들아.

아무 걱정 말고 그저 존재하자.

함께 여기서 존재하자.

다음 물 주는 날까지 버티고

그다음 물 주는 날까지 살아남고

우리 그렇게 같이 존재해 보자.


그래, 그러자는 대답을 얼핏 들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어느 아침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잡문103 - 엄마, 미안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