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105 - 밤이 깊은 날

by 백홍시

밤이 깊었지요.

하지만 오랜 어둠에 익숙해진 나는

되려 앞이 잘 보인답니다.

곧 하늘이 맑겠지요.

하지만 온종일 흐린 나는

려 눈이 부실뿐이랍니다.

당신도 곧 나를 떠나겠지요.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나도 나를 떠날 것이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날일지라도

그런 말 따위 아무 의미 없는 날일지라도

모든 날은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을 겁니다.

나도 곧 사라질 것이기에.

어둠에 익숙해진 날들이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계속된다 하여도

그 또한 사라지겠지요.

그리하여 모든 것은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아무렇다 할 내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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