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유는 첫 번째로 나의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기록을 하지 않으면 나의 뇌는 선택적으로 기억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 선택이라는 것은 나의 생각 회로에 기반하게 될 것이고. 나의 부정적인 회로로는 부정적인 기억만 강렬히 남기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기억들만 잔뜩 안고 사는 삶은 정말이지 끔찍하지 않은가.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특히 감정이란 너무나도 빨리 사라지는 것 같다. 특히 긍정적 감정들은 더욱 그러하다.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것들은 정말 금방 사라지는데, 슬픔이나 서러움 같은 것은 오히려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러니 기쁨이나 즐거움은 더욱 적극적으로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종일 한숨을 잔뜩 쉬었다. 울고 싶은 하루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자 맥이 다 빠져 버렸다. 통곡할 힘도 없어서 대충 눈물을 흘리며 빵으로 어물쩡 끼니를 때우고는 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래도 기분이 조금 개운해졌다. 머리를 말리고는 깨끗한 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30분 후 나는 웃다가 광대가 아파졌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물 흘리던 나는 정말 웃기게도, 눈물 흘릴 만큼 웃고 있었다.
나의 숨 쉴 구멍.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는 것, 매주 챙겨보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것,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의 전날에는 맛있는 음식을 잔뜩 시켜 먹는 것 등등. 물론 그런 것들로 모든 스트레스가 홀랑 날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순간들을 기록해 놓고 싶다.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들이란 언제든 캐치해낼 수 있다. 레이더만 잔뜩 세우고 있는다면.
이런 기록들이 모이면 나에게 훌륭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이것을 책으로 엮는다면, <어느 때고 사용할 수 있는 기분전환 모음집> 정도를 제목으로 하고 싶다. 나락까지 떨어진 마음이 이런 임시방편으로 완전히 나아질 수는 없을지라도, 이런 방법들을 모으는 것은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긴다고 하지 않는가. 우울과 불안의 정체를 알고 그것에 대처할 나의 무기를 알아야, 평생을 함께 해 온 그것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은 중요하다.
하지만 늘 이길 필요는 없다. 너무 힘들면 또 대충 져 주면서 그것들에 몸을 맡기면 된다. 어차피 나의 감정들 또한 나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겼다 졌다 하며 계속 그들과 살아가야 한다. 이 싸움은 포탄이 터지는 전쟁일까? 그렇지는 않다. 어찌 보면 놀이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진다고 해서 패배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진짜 전쟁이 아니라 놀이라는 것, 그것을 견지해야만 이 싸움에 가벼운 마음으로 참전할 수가 있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내 삶도. 나도.
모든 것이 사라지는 삶에서 기쁘고 즐거운 순간들을 기록해 놓는 것은 참 소중한 일이다. 기록해 놓은 숨구멍들을 꺼내어 우울과 불안에 맞서고, 뭐 또 가끔은 또 우울하면 우울한대로 우울해하고. 그렇게 대충 놀다 가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해서 내일 할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마음을 조금은 채운 채 출근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서 좋은 기분을 앗아가려는 많은 것들에게 고하자. 빼앗아 가려면 빼앗아가라. 나는 나대로 또 채우면서 살 테니. 이 기록은 나의 무한동력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