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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의 새벽별 Jun 02. 2022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라는 중입니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_에드워드 사이드


- 장 주네, 당신은 누구신가요

 책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베토벤, 슈트라우스, 람페두사, 글렌 굴드 등의 예술가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말년에서야 보여주는 특이한 작품 양식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작품 활동에 반하는 말년성의 독특한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과 그들의 인생의 흐름에 전혀 맞지 않는 비시의적 특성을 갖는다. 일생동안 이뤄 놓은 많은 인정과 보상을 거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언뜻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말년의 용인된 안정성을 포기하고 기존의 기대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권리와 자유를 추구한 자들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것을 ‘자발적 망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말년에 이르지 않고서도 처음부터 말년성의 양식을 보여주는 예술가가 있다. 소설에서는 실존주의 작가, 희곡에서는 부조리극 작가로 각광받았던 장 주네이다. 사르트르로부터 ‘현대의 고행승’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장 주네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거침없이 분출하면서 기성사회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생아로 태어나 매춘부인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약탈과 매음 등 각종 범죄로 수감생활을 했던 주네의 삶이 그의 독특한 작품 양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도둑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위탁가정을 떠난 후에도 계속된 비행으로 메트레 감화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인문고전 독서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하게 된다.


주네의 작품들은 대부분 노골적이고 불편하다. 그의 작품 『도둑 일기』를 보면 마치 폭력과 악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년의 작품인 『병풍』과 『사랑의 포로』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기존의 권위와 시스템에 대한 배반을 보여준다. 주네는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해석 자체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정체성을 거부하고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닐까. 그는 어떠한 외적 요소에도 관계하지 않고 사물이든, 사람이든, 사상이든 스스로 판단함으로써 자유롭기를 원했다. 도둑이자 소설가이며 동성애자였고, 프랑스인이지만 팔레스타인 운동을 지지했던 그는 작품뿐 아니라 삶 자체가 역설과 전복의 연속이었다. 주네는 세상이 자신을 오해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스스로를 정체성을 넘나드는 여행자이자 방랑자로 여겼다. 그에게 정체성은 반복적으로 의심하고, 끊임없이 부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정체성은 우리가 사회적·역사적·정치적, 혹은 영적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다. 문화의 논리와 가족의 논리가 여기에 더해져서 정체성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주네처럼 비행을 저지르고 격리되고, 또 권위를 위반하고 재능이 있고 이를 즐기는 사람은 그로 인해 자신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희생자이므로, 그에게 정체성은 결연하게 반대해야 할 무엇이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_120쪽

주네에게 정체성은 왜 결연하게 반대해야 하는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주네는 정체성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여 영혼의 피와 살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는 대부분 정체성을 족쇄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벗어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네가 처한 삶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정체성을 반대해야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고통의 암흑 속에서 그대로 썩거나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휘발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주네는 무엇으로 대상화되고 희생되어 ‘죽은 영혼의 육체를 가진 나’가 아니라 정체성의 배반을 통해 지금 속한 세계를 뚫고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살아 숨 쉬는 영혼의 나’의 모습을 추구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정체성의 결연한 반대를 통해 세상 모든 일에, 나의 모든 것에 ‘당연한’것은 없음을 주창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는 당위성의 전복을 보여주고, 자신에게는 온전한 자유를 선사하는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 알을 깨고 나와서 자발적 망명자로

우리는 사회적 인정과 평판에서 자유롭기가 어렵고, 기존의 질서와 화해되지 않는 긴박감을 견디기가 힘들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규정된 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로서의 나’가 자라나길 원한다면, 기존의 정체성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와해시켜야 한다. 그때서야 사회가 씌운 정체성의 덩어리가 아닌 진정한 나로 살아갈 수 있다. 주네야말로 자신의 삶과 작품으로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미 단단하게 굳어진 정체성을 어떻게 벗어던질 수 있는가. 그 답은 『데미안』의 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갖가지 정체성을 뒤집어쓴 채 살아간다. 정체성은 일종의 거대한 사회적 가스 라이팅이다. 그것을 깨부수기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세계를 열어봐야만 알게 된다. 기존의 내가 어디에 갇힌 채 살았는지를. 알을 깨고 나오는 그 순간이 내가 속한 세계의 당위성을 전복시키는 순간이며, 새로운 세계로 자발적 망명자가 되어 나아가는 순간이다. 내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자 기존의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인 것이다


요즘 나는 익숙하고 길들여진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서 불편하고 낯섦의 긴장상태에 나를 놓아보는 연습 중이다. 첫 번째로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쉽지 않았지만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나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 끔찍이도 싫어했던 그림 그리는 시간이 나에게 힐링의 시간이 된다는 것은 기존의 세계를 박차고 나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과 집안일을 균등하게 나눈 것이다. 모든 집안일은 엄마 몫이라는 당위성을 엎었더니 아이들은 당황스러움과 불만을 표출했다. 나도 갈등의 상황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시스템에 천천히 적응해가면서 모두가 이전보다 조금씩 더 성장했다. 아이들은 주말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차려진 아침식사를 먹으면서 나는 엄마 역할의 해방감을 만끽한다.   


죽음은 언제 닥쳐올지 모른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의 양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 ‘어차피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거야.’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난다면 남은 내 삶은 시간의 영역을 넘어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주네 식으로 말하자면 정체성의 결연한 반대를 통해 ‘살아있는 날것의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알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부단히 자라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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