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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의 새벽별 Jun 26. 2022

책 읽는 행위

책은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끝없이 이어지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삭과 야곱의 모든 살붙이들의 선량하고 괴로운 관계”



선량하고 괴로운 관계; 가족
가족을 이보다 더 잘 정의할 수 있을까. 물론 저마다 다른 감각과 다른 의미로 가족의 정의가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보다 더 ‘가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선량하고 괴로운 관계.’ 이 한 구절 덕분에 최승자 시인에게 빠졌다. 최승자 시인은 알고만 있었지, 책을 읽어 본적은 처음이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산문이지만 시집 같기도 했다. 얕은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깊이가 담겨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어떻더라고 소개할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는 세 가지 행위를 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최승자 시인에게 빠진 덕분에 저자의 또 다른 책을 주문했다는 것이고([어떤 나무 들은], [이 시대의 사랑]),

두 번째는 죽어있던 노자의 도덕 경책을 책장에서 건져 올렸다는 사실이다.(저자는 노자가 우주, 사회, 개인이라는 세 겹 미스터리 신비주의를 완벽하게 시적으로 소화, 전달했다고 이야기한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그동안 심취해있던 서양의 신비주의를 끊었다고.)

그리고 마지막은 나에 대한 질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나에 대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속해서 쉴 새 없이 목구멍까지 다다닥 차고 올라왔다.



“서울에서 잘 살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을 ‘전원으로 돌아가자’라는 능동적 의지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슬며시 솟아오르는 의혹을 그러나 발뒤꿈치로 슬쩍 뭉개버린 채...”

“이 구제불능의 게으름은 나의 비관주의 혹은 패배주의와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갖고 있겠지만.”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진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원하는 것은 자유인지, 정확히 어떤 자유인지, 나는 정말 불편하고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을 견딜 수 있는 건인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편안하고 단정한 삶은 아니었는지.
감당하기 힘든 질문들이 솟구쳐 나의 목젖을 쳤다. 마치 대답하라고 채근하듯이...

나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삶은 그 누구의 삶도 아닌 나의 삶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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