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나의 새벽별 Dec 07. 2021

< 엄마에서  다시 나로 >

- 산티아고로 떠나는 상상여행 -


거의 30년 만이다. 꼭 다시 가보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 때문에 며칠 전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첫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30년 전 그랬던 것처럼 홀로 떠나는 여행을 흔쾌히 지지하는 짝꿍과 사랑하는 두 딸의 배웅을 받으며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며칠간의 불면으로 인해 피로가 쌓였는지 금세 눈꺼풀이 나를 뒤덮었다.


25살에 결혼이란 걸 했다. 결혼을 했으니 아이는 낳아야 할 것 같았다. 철도 없었고, 나만의 철학도 없었다. 임신은 한방에 되는 건 줄 알았고, 아이는 그냥 크는 줄 알았다. 시간과 체력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병원에 가서 임신이 가능한 날을 받아왔다. 한 달, 두 달, 석 달···.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으니 아이라도 일찍 가져야 할 것 같았다. 친구들이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아가는 동안 나도 엄마라는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임클리닉에 문을 두드렸다. 1년 6개월의 시간 동안 매달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실패를 마주해야 했다. 한 번의 유산을 경험하고 드디어 나에게도 소중한 아이가 찾아왔다. 나에게 모성이란 것이 그리 클지 몰랐다.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알 수 없는 모성은 나날이 부풀어 갔다. 어느 날은 온 집안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다가, 어느 날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채 펑하고 터졌다. 엄마로서의 자괴감에 매번 좌절했다. 나에게는 자연스럽고 적절한 엄마의 표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엄마이고 싶었다. 어디가 균형점인지 알지 못한 채 외로운 줄다리기를 쉬지 않고 해왔다. 줄을 얼마나 당겨야 하는지 혹은 얼마나 늘여줘야 하는지 누군가가 가르쳐 주기를 바랐다. 백 권이 넘는 육아서를 뒤적여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멈춰 서야 할 순간을 알려주는 책은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혼 주의자라는 걸 알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를 낳고 나서야 지극히 개인주의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안의 그릇은 나를 품기에도 작았다. 아이들을 담을 공간이 부족했다. 나를 돌보기에도 벅찼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키우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내가 아이를 키웠다. 모성과 개인주의의 모순적인 양립 아래에서도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흔들리고 좌절하기를 반복했지만 말이다. ‘나는 과연 좋은 엄마였을까?’ ‘아이들이 나를 따뜻하고 포근했던 엄마로 기억해줄까?’ 이것조차 욕심이란 걸 알기에 차마 아이들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조용히 내 가슴에 묻는다.


“잠시 후 이 비행기는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합니다.”

드디어 파리에 다시 발자국을 찍었다. 프랑스를 다녀왔던 친구와 함께 가는 거라고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혼자 오른 첫 여행지. 그때의 파리가 다시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더니 이십 대의 내가 눈앞에서 그렁거리고 있었다.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감성은 주머니에 찔러 넣어둔 채, TGV를 타고 바욘 역으로 갔다. 바욘 역에서 다시 국철을 갈아타고 생장 피에 드 포르로 갔다. 역에서 내리니 순례길을 걸으러 온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결국엔 여기를 왔구나.’

결혼 10주년이 지나면서부터 줄곧 짝꿍에게 이야기해왔다.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고 나면 혼자 산티아고로 떠날 거야.” 20년 동안 아이들을 키운 나를 위한 일종의 선물이자 육아 졸업식이었다. 엄마로서의 삶에 끝을 맺고 나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의례가 필요했다. 거창한 이유를 다 집어 치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꼭 오고 싶었다. 산티아고에 있는 나를 그리며 힘든 순간을 견뎌왔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꿈꿔왔다. 내 입을 통해 꾸준히 꺼내왔던 말들이 모여서 결국에는 두발을 지금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생장 피에 드 포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 지점이었다.

여기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까지는 약 800km이다.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쯤 된다고 했다. 이 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우선 순례자 여권이 필요했다. 여권이 있어야 순례자 숙소에서 숙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순례자 여권을 받기 위해 사무소에 들어갔다. 다행히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길을 걷기에 가장 좋은 때는 5~6월, 9월~10월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학이나 휴가철인 7~8월에 가장 많이 이 길을 걷는다. 지금은 10월. 조용히 걷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여권을 받으면서 순례자임을 인증하는 가리비 껍데기도 구매했다. 모두들 가방에 가리비 껍데기를 달고 다닌다. 이 길의 주인공인 산티아고(야고보의 스페인어 발음이다.) 성인의 유해가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가리비 껍데기로 온몸이 덮여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가리비 껍데기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상징물이 되었다. ‘내일부터 40일간 이 길을 걸을 것이다. 무엇을 이 길 위에 내려놓고 무엇을 담아가야 하는 걸까. 어떤 목적 따윈 없다. 목적 없이 왔으니 길 위에 나를 맡길 뿐이다.


새벽 일찍 눈을 떴다. 간단히 조식을 먹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의 공기는 역시 좋았다. 청량하고 개운했다. 첫날이라서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그동안 이 길을 걷기 위해 단련한 내 몸이 산티아고 대성당에 닿을 때까지 잘 버텨주길 바랐다. 길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지평선에 닿을 듯 닿지 않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내보여 주었다. 다행인 건 화살표 표시로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길은 화살표가 없다. 갈 수 있는 길 또한 여러 갈래이다. 갈라지는 길목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선택한 길을 걸으면서도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수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와 보니 선택보다 중요했던 것은 길을 가는 태도와 마음이었다. 미련과 후회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걷고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길에 오른 지 3일째, 스페인을 사랑한 작가 헤밍웨이가 머물며 글을 썼다는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카페 ‘이루냐’에 앉아 잠깐의 사치를 즐겼다. 오랜만에 제대로 내려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하고 시큼한 향을 입안에 그득히 남기고 온몸으로 재빠르게 퍼져나가더니 축 늘어져있던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아, 얼마만의 커피인가. 행복하네. 이제 살 것 같다.’ 순례길을 걸은 지 이제 고작 3일째인데 석 달은 걸은 사람 마냥 느끼고, 행동하는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작위적이고 가벼운 존재인가.  

“부엔 카미노” 지나가던 젊은 커플이 나에게 인사했다. 기나긴 순례길이 각자에게 좋은 길이 되기를 바라며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뜻의 인사이다. “부엔 카미노”나도 인사를 건넸다.

이 길에 오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보따리를 한 아름씩 안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의 배신으로 이혼을 한 후 여기에 왔다는 영국 국적의 젊은 여자, 지금껏 혼자 살면서 전 세계의 여자들을 다 사귀어 봤지만 인생의 의미가 없었다는 이탈리아 태생의 남자, 직장에 온몸을 바쳐 일했지만 결국 해고당한 인생만 남았다는 인도의 젊은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여의고 혼자 남은 인생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떠나왔다는 중년의 프랑스인,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하다 정년 퇴임한 후 길을 걷고 있다는 한국인, 강압적인 집안에서 탈출하고 싶어 왔다는 중국에서 온 여인. 세계 각국에서 저마다의 인생을 등에 지고 온 사람들이다.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다 왔지만 모두가 같은 이유로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어 주어진 인생을 다시 살아나가기 위해서였다.

예전에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평생 나는 누 구인가하며 자아를 찾다가 죽을 사람이야.” 갑자기 떠오른 친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친구가 무당이었네. 나는 오십이 넘어서도 자아를 찾고 있구나.’ 여전히 자아를 찾지 못했다는 씁쓸함과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겹쳐 입가에 미소를 그었다.


걷기 시작한 지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났다. 낮에는 끝없이 걷다가 저녁이 되면 잠시 멈췄다. 조촐하지만 하루의 피곤을 한순간에 녹이는 저녁 만찬과 까마득한 밤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보고 있자면 오늘 하루도 무사했음에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다. 달콤한 잠에 잠시 빠져들고 나면 새벽이 나를 깨웠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숙소에서 나와 걸었다. 새벽이 주는 신비로운 에너지가 나를 채워주었다. 낮에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외로운 길에서의 새로운 만남은 따뜻한 기쁨과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하염없이 걸어가야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도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길이 나를 받쳐주고, 바람이 나를 북돋아 주고, 태양이 나를 비춰주어 오직 자연과 나만이 호흡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소중했다.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마치 생명수 같은 것이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에는 생명수가 늘 부족했다. 내 안의 땅이 쩍쩍 갈라져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도망치듯 나왔다. 혼자서 오롯이 하루를 보내며 홀짝홀짝 생명수를 들이켜고 나면 간신히 젖은 땅 위에서 다시 일 년을 살았다.


책에서 보던 유칼립투스 숲길에 당도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하늘 위로 쭉쭉 뻗은 나무들이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초록이 주는 편안함과 숲이 주는 맑은 공기가 조화를 이루며 나를 감싸 안았다. 팜플로나에서 만났던 젊은 커플을 다시 만났다. 괜한 반가움에 서로 포옹을 했다. “부엔 카미노” 우리는 서로의 길을 축복해 주었다.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은 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만남과 헤어짐은 수차례 반복된다.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있지만 깊은 흔적을 새기는 인연도 있다. 좋았던 흔적들은 물론이고 아팠던 흔적들까지도 모두 의미 있는 삶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감사했다. 기복주의 신앙이었던 내가 감사기도를 드리게 된 건 떼제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떼제는 나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은 무엇을 가르쳐 주었을까. 산티아고의 길은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았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 때로는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모습과 원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까지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것으로부터 또 다른 길이 열린다. 20년 동안 내 몸에 맞지 않는 엄마라는 옷을 입고 살아왔다. 그 옷이 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 같았다. 분명 사랑하는데 내 전부를 내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를 찢는 고통이었다. 늘 자유를 갈망하는 죄수처럼 몸은 감방 안에 두고, 마음은 창살 밖에 두었다.


드디어 산티아고 광장에 도착했다. 40일 만에 종착점에 도장을 찍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지친 몸을 그대로 바닥에 뉘어 쉬고 있었다. 나도 광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을 기대는 것도 버거워져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얀 티끌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새파란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드디어 끝났다.’

남은 하루 동안 숙소에서 쉬고 다음날 산티아고 대성당을 찾았다. 성전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왠지 이곳에서 하는 기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쑥 나를 훑고 지나갔다.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에게나 엄마라는 자리는 힘들고 어려운 자리인데 나는 왜 유독 더 힘들어했을까.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던 이상에 짓눌려 있었던 걸까. 날마다 내가 주려 했던 것들이 아이들을 위한 사랑이었는지, 나를 위한 위안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아이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속상했던 것인지, 내 뜻대로 자라주지 않아서 화가 났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늘 진지하고, 심각하며, 생각이 많아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엄마 곁에서도 나름의 모습으로 잘 자라 준 두 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한 아이가 자라는데 필요한 것은 엄마 몫만이 아니었는데, 못나고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살았더라면 조금 더 쉬웠을 걸.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자주 깔깔 웃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는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였을까.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다고 엄마 역할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함께 걸어오던 길에서 내려와 각자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길을 가다가 힘들 때 서로를 떠올리면 힘이 나는 존재이길 바라본다. 나와 아이들의 새로운 길에 인사를 보낸다. “부엔 카미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