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이렇게도 좋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미래가 두렵기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의 기저에는 끔찍한 공포가 있다.
The reason we all like to think so well of others is that we are all afraid for ourselves. The basis of optimism is sheer terror.
- 오스카 와일드-
결혼의 동기, 결국은 타이밍?
독자들을 위해 본인에 대해 짧게 소개하자면, 나는 지방의 모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3년간 그렇고 그런 회사 두 곳을 거치며 회사생활을 했다. 그러다 뒤늦게 눈이 맞은 대학 동 기 남편과 결혼하여 영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어찌어찌 떠돌다 5년 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엄마 이자 아내이자 작가로 살고 있다. 아주 평범한 대한민국 30대 남자인 나의 남편 이모 씨, 그 동갑내기 남자와 결혼한 스토리부터 말해야 하나. 대학 동기라고 했지만 우린 CC(캠퍼스 커플)가 아니었다. 17년 전 우리 가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무려 2004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의 첫인상은 삶은 달걀을 으깨 넣은 새콤한 소스의 샌드위치 냄새로 기억된다. 2월 신입생 OT(오리엔테이션)에서 서로 친해져 보라고 선배들이 조별로 요리를 하는 과제를 주었는 데, 그가 속했던 조에서 만든 샌드위치를 드시곤 나에게 첫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거 좀 제대로 삼키고 말하지 그랬니.) 그 강렬한 첫 장면으로 돌아가 그를 처음 본 기억 속의 내 얼 굴을 살펴보면, 저 촌뜨기 같은 여드름 투성이 꼬꼬마랑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표정이었을 게다. 물론 그 당시 그의 의견은 내 알 바 없으니, 생략하도록 한다. 우리는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다닌 동기였지만, 그렇게 각자의 연애 생활, 과 생활, 구직 활동 기간을 거쳐 졸업했고, 우 리가 사귀게 된 것은 졸업 후에도 한참 뒤인 2013년이었다. 대학을 입학하여 처음 만난 지 9년 만에 연인 사이가 된 것이다. 교제를 시작한 이후 혼인신고서에 도장 찍기까지는 단 5개월이 걸렸을 뿐이다.
서로 애인이 없던 시기엔 가끔 연락도 하고, 다른 남자 동기 들, 남사친(남자사람친구)들보다는 가깝게 지낸 것이 사실이 다. 아무래도 역시나, 남녀 사이에 친구관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길고 긴 친구로서의 기간을 뛰어넘어 연인이 된 후 결혼까지는 속사포로 진행된 걸 보면. 둘 중 하나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고선 유지되지 않을 만큼 긴 기간이기 도 하고, 결혼이란 게 타이밍이 큰 영향력을 미치는 문제인 것도 새삼 실감한다. 사랑의 크기나 집안, 학벌, 경제력 같은 조건보다도 언급된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말할 수 있는 그 단 어. 타. 이. 밍. 지금 ‘기승전타이밍’으로 얼버무릴 거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결혼한 부부, 돌싱 남녀, 노부부들에게 물어보면 결 혼의 이유는,
1. 제대로 된 임자 만나서(동의어로 소울메이트, 영원한 사랑 등이 있음)
2. 조건 보고(집안, 경제력, 직업, 나이, 외모 등)
3. 어쩌다 보니 이미 내가 결혼했더라(조심성이 부족하고 불같은 사랑을 하는 스타일 또는 속도위반).
이 세 가지로 압축될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단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타이밍이다. 다 시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남편과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1.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이었으니 요즘 추세에 비하면 이른 감은 있으나 결혼 적령기였고, 보통 2~3년은 사귀고 결혼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 타이밍이면 지금쯤 한 번 사귀어 보긴 적당하겠군.’이라 고 나란 여자는 생각했을 것이다.
2. 갑자기, 그냥 조금 친한, 나에게 조금은 이성적 호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사친’이 더 이상 코찔찔이 대학 동기 놈이 아니 라 늠름한 직장인이 되어서, 우리가 대학시절을 보낸 고향 부산이 아니라, 서울이란 대도시에 나타났고,
3. 나는 막 끝낸 다른 연애들로 가슴이 시리고 우울하고, 괜스레 누군가 만나고 싶었고,
4.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지탄받을지도 모르지만, 그 와중에 나도 실은 소심한 페미니스트라고 덧붙이고는 싶은 얄팍한 마음을 눌러 담아 쓰며) 야근과 박봉으로 점쳐진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에 염증이 나던 참에 ‘취집’이란 거에 15%쯤은 마음이 기울기도 했던 타이밍이고,
5. 저어기 유럽 어디에서 해외 직장생활을 하다 서울에 온 이 남 자, 괜히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사귀자고 말하면서 결혼해서 영국 에 같이 가자고 하질 않나. 나 영국이라면, 출장 가서 반년 간 군 대처럼 뺑이 친 덕분에 치를 떠는 여자였는데, 직장이 아니라 결혼 생활을 영국에서라… 아아… 다를까 고민하기도 했고, 결국은 이 남자의 보통 남자 같은 사귀기 전 사탕발림에 홀 랑 넘어가 버렸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남편아, 너무 솔직해서 미안. 너도 그렇다고 왜 말을 못 해. 너도 실상은 ‘인생의 여자’ 였다거나 ‘마지막 사랑’이었다기보단 타이밍이었다고 왜 말을 못해. 억울하면 너도 책 써. 그래, 결혼은 타이밍이란 스토리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그 래서 이쯤에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왜 저 타이밍에서 취집을 떠올렸나, 왜 영국에서의 (남편의) 직장생활은 이 헬조선 한국보단 나을 것이라 생각했나, 바로 이것이다.
입 아프도록 말해도 아직도 거북이 같은 속도로 진보해가고 있는 그것. 여성의 사회적 지위, 출산/육아휴직 보장, 승진의 기회 등! 그리고 사회생활과 관련된 그 수많은 ‘경력단절 전업 맘’들의, ‘눈물겨운 워킹맘’들의 널리고 널린 스토리들. 야근을 죽도록 하고도, 주말 출근을 불사하고도 땡전 한 푼 더 받지 못하는 수많은 이 땅의 월급쟁이들, 그리고 그런 남 편들로 인해 또다시 고통받으며 집에서 ‘독박 육아’란 걸 한다며 울부짖는 여자들, 워킹맘 해보겠다고, 난 이 한 몸 부서져도 할 수 있다고, 친 정이고 시가고 도움 못 받는 상황이라고, 눈물 콧물 빼며 갓 돌 된 아이를(또는 심지어 3개월 된 젖먹이를) 어린이집에 보냈 는데, 아이는 다쳐오거나 성폭행당하거나 학대당하고…. 적 다 보니 성질이 난다. 분통이 터진다. 이놈의 나라는 도대체 언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걸까. 출생률이 마이너스네 어쩌네 징징대지 말고, 그리고 당신도 아이 키워봤으면, 직장 생활해봤으면, 제발 출생률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될 실질적인 정책을 제시해달라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쓰다 보니 이만 살포시 접도록 한다. 결코 내가 노트북을 쾅 닫지 않았음을 유념해주심다면 좋겠다.
위 글은 2021년 출간된 <이혼하고 싶어질 때마다 보는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작가 본인임.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