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공주드레스를 입지 않아도 넌 멋지단다

<이혼하고 싶어질 때마다 보는 책> 중

by 박서운과박식빵

딸아이를 키우다 보면 진심으로 피하고 싶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관문이 하나 있다.

빠르면 세 살 무렵, 아무리 늦어 도 네다섯 살에는 찾아오는 ‘공주병’이다.

물론 간혹 공주 치마, 왕관이나 엘사 드레스보다 자동차나 로봇 장난감을 더 좋아하고,

반바지와 운동화를 더 즐겨 입고 신는 여자아이들도 있다지만, 그 나이대의 절대다수 여자아이들은

핑크색에 열광하고, 공주옷과 드레스에 열광한다. 그들의 옷장은 온통 분홍색으로 가득 차게 되고,

엄마가 입혀주는 대로 고분고분 귀염진 옷을 입던 아기들은 어느새 사라져 있다.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하는 아침마다 딸 가진 엄마들은 한 바탕 전쟁을 치른다.

제발 그렇게 화장실 가기 불편하게 생긴, 따라서 어린이집 선생님도 싫어할 만한

그 치렁치렁한 샤드레스는 벗고 편한 쫄쫄이 바지나 추리닝 바지를 입으면 좋겠는데,

나의 상전님은 그딴 천 쪼가리를 입어주실 리가 만무하다. 백 번에 한 번쯤은

그 추리닝 바지가 핑크색이라는 전제하에 입어주는 관대함을 베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엄마는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그 바지를 입혀 보내기 위해

아침부터 막대사탕을 쥐어주기도 하고, 머리 스타일만은 최대한 공주스타일로 정성을 다해 묶고

리본도 달아주고 하다 보니, 추리닝에 리본 치렁치렁한 언밸런스 스타일이 완성되는

코미디가 벌어지기도 한다. 나 역시 그녀와의 싸움에서 수없이 지고, 결국 그녀가 선택하는 것은 오직 치마와, 그것도 아랫단이 펄럭펄럭 넓게 퍼지는 공주 드레스 같은 치마라는 걸 알고 나서는

돈 낭비 하기 싫어서 그런 옷만 사 모으게 되었다. 바지를 사놔 봤자, 하늘색 바람막이 잠바나,

운동화를 사놔 봤자 결국은 안 입 고 안 신어 작아져 못 입게 될 때까지 처박혀 있다가 그것이 내 눈에 띌 때마다 신경만 긁어놓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나이 무렵의 여자아이들이 치마만 고집하는 것은 동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공주님들이 늘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런 공주들만이 멋진 왕자님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학습했기 때문이다. 돈 많고 고귀한 신분의 예쁜 공주님은

언제나 멋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한껏 부풀려 매만진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디즈니에서 새로운 신여성의 사상을 반영한 공주 캐릭터들을 내놓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정말로 안도했다. 더 이상은 낡아 빠진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스토리로

우리의 희망인 새 시대의 새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겠구나. 최소한 내가 보여주지 않아도

결국 알게 되어버릴 신데렐라와 백설공 주 이야기가 이 세상 공주 이야기의 전부가 아닌 것을

알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수준의 변화만 있어도 깨어있는 엄마들이라면

어떤 공주가 진짜 멋진 공주인지 자신의 딸에 게 일러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하나뿐인 내 외동딸이 유행에 뒤처지거나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하는 건 또 싫다.

당연히 나는 그녀를 데리고「겨울왕국 2」를 보러 가야만 했고, 그 극장에

수많은 네 살, 다섯 살 엘사 여왕님이 왕림하실 것을 안 봐도 알 수 있었기에

그녀에게 엘사 드레스도 사주었다. 그리 비싸지 않은 적 당한 것으로.

또 웬만하면 공주 인형이나 인형의 집 같은 편 향적인 장난감은 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장난감이 많은 친구네 집에서 놀다 오면 어김없이 불쌍한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한 채 갖고 싶다 말하기에

가끔은 모른 척 사주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는 잘하고 있는 엄마라고 스스로 위 안 하면서.

또 때론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잠시의 시간 동안 나를 좀 혼자 둬 줬으면 하는

얄팍하고 이기적인 심 산으로. 또 한편으로는 내가 어릴 적에 그토록 갖고 싶어 했으나 가져보지 못한

멋지고 으리으리한 삼층짜리 인형의 집이나 옷을 열 벌도 넘게 가지고 있는

마론 인형을 사주면서 대리만족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는 아이 친구의 집에 같이 놀러 갔다가 그 친구 가 가진 변신 공주 드레스를 보곤

또 눈이 하트 뿅뿅 플러스 불쌍 가련한 표정이 되어 있는 딸을 발견했다.

그 집은 아빠 가 딸바보라 엄마가 시키지도 않는데 늘 딸이 좋아할 만한 드레스나 공주 장난감,

화장하는 장난감 같은 걸 사다 준다고 했다. 처음엔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

내가 챙기지 않아도 애 아빠가 아이 장난감도 알아보고 사다 주고,

저렇게 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아빠의 모습이라니. 내가 늘 그리던 딸바보 남편의 모습이었다.

참고로 나의 남편도 물론 딸을 너무 사 랑하지만, 딸과 아내는 그에게 늘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다. 그러기에 육아에 관해서는 늘 한 발 물러나 있곤 했다.

내가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이래라저래라, 그딴 단 어는 딸 앞에서 쓰지 마라 지적질을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 거나 귀찮다는 듯 알았다고 대꾸했다. 내 말에 반박하지 않는데서,

그 정도의 수준에서 나는 만족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대한민국에 두 발 벗고 나서서 페미니스트 서적을 읽고, 딸을 위한 섬세한 언어 사용에 대해 고민하고, 딸을 위 한 동화책을 직접 선정하고,

젠더 중립적인 장난감을 골라주는 사랑스러운 아빠 따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젠장.


친구의 공주 옷을 빌려 입고 한참을 신나게 놀던 딸에게 이 제 집에 갈 시간이라고 하자

그 치마를 벗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저녁에 남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줬더니

그냥 하나 사주라고 했다. 심지어 아이가 불쌍하지 않냐고도 했다.

이런. 나는 나의 말에 그렇게밖에 대답하지 못하는 너의 머릿속이 불쌍하다, 남편아.

나는 공주 옷을 벗고 싶어 하지 않는 다섯 살 딸아이를 겨우 달래 집으로 데려왔고,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 말해주었다.


“OO야, 넌 그런 공주 드레스 입지 않아도, 엄마 아빠에게 제일 소중한 공주님이야.

모든 공주님이 꼭 드레스를 입는 건 아니야. 엄마랑 같이 읽은

『종이가방으로 만든 옷을 입은 공주님(원제: Paperbag Princess)』은 정말 멋지잖아?

드레스 입지 않고 있어도, 온통 불나서 다 타버린 곳에서 타다 만 종 이가방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자기가 좋아하는 왕자님을 구 하러 무서운 용에게 가잖아. 용기 있고 똑똑한 방법으로 용을 물리치고

왕자님을 구해내잖아. 그런데 정작 그 바보 같은 왕자님은 뭐라고 했어?

‘당신은 왜 그런 옷을 입고 있죠? 공주답지 않군요. 어서 가서 예쁜 드레스를 입고

머리도 정 리하고 다시 나에게로 오세요.’라는 바보 같은 대답만 했지?

OO이는 그 공주님이 멋있지 않았어? 엄마는 정말 멋지던데. 예쁜 드레스 입지 않아도

정말 멋있어 보였잖아. 자기 혼자 서 용을 물리치러 갈 줄도 알고,

바보 같은 왕자님이 하라는 대로 해서 그 바보랑 결혼하지도 않았지.”


그러자 아이는 더 이상 공주 옷을 사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다.

묵묵히 그 새까만 눈동자를 내 얼굴에 고정한 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내 말을 100%는 아니겠지만 80% 정도는 이해한 것 같았고, 나는 정말로 뿌듯함을 느꼈다.

아싸. 돈 굳었다.


여자아이들이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어린이집에 갔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의 핑크홀릭에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아이들의 공주병을 고쳐 나갈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반대로 남자아이들이 키 즈카페에서 공주드레스를 입어보고 싶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는

엄마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한술 더 떠 엘사 드레스를 하나 사준다면 좋겠다.

누가 알겠나. 그 아이가 커서 세계적인 여성복 디자이너가 될지.


또! 말하지만 모든 딸 가진 아빠들이 진정한 의미의 찐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 이 딸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아빠의 모습임을 깨닫고, 또 실천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역시 또 알고 있다. 스스로 이런 책을 사거나 빌려보는 남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니 여성들이여,

이 책을 읽고 남편과 남자친구들에게 권하라. 또 널리 퍼뜨려서 그네들의 남편과 남자친구 중 어느 하나의 얼 간이라도 더 구원하도록 하자. 그것은 선순환이 되어 내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찐 페미니스트로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가며 더 좋은 글을 쓰게 해 주리라.

감사합니다. 아멘. 나 무아미타불.




이 글은 2021년 출간된 <이혼하고 싶어질 때마다 보는 책>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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